예술가가 된 이정미와 매리언

17.03.15 1

출처: 노트폴리오


"피청구인 대통령 박근혜를 파면한다"

소름 돋는 순간이었다. 벌써 일생의 두 번째 탄핵 재판을 실시간으로 방청했고, ‘역사가 바뀔뻔한 날’과 ‘역사가 바뀌는 날’을 경험했다. 일부 집단을 제외하곤, 박근혜의 탄핵을 진심으로 축하했다. 아주 당연한 결과임에도, 지난 몇 년간 비상식적인 일들이 가득한 이곳에서 행여 탄핵선고가 기각될까 마음 졸이는 게 이상했지만, 만족스러운 결과였다.

 

 3월 10일 오전, 평소보다 이른 시간에 출근한 이정미 재판관은 긴장된 상황을 반영하듯 머리카락에 미용도구를 그대로 꽂은 채 청사로 들어갔다. 이미지 및 캡션 출처: 연합뉴스


결코 일상적인 일은 아니지만 이번 탄핵선고가 여러모로 흥미로운 건, 그날 발생한 다양한 ‘해프닝(happening)’덕분이다. 선고당일, 이정미 재판관은 머리에 헤어롤을 만 채 출근했다. 언론은 앞다투어 ‘그녀의 헤어롤’을 보도했고, 사람들의 반응은 실로 다양했다. 직관적으로 가장 먼저 든 생각은 ‘한 나라의 역사를 결정하는 날이니 얼마나 긴장했으면!’이었다. 하지만 이후의 반응은 유쾌 그 자체였다.

누리꾼들이 이정미 권한대행의 헤어롤이 탄핵인용의 징표라며 공유한 사진, 출처: 머니투데이

 
가장 흥미로운 현상은 사람들이 이정미 재판관이 일종의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고, 그러니까 그녀의 행위에 특별한 메시지가 있다고 받아들인 것이었다. 혹자는 “재판관 8인 모두 박근혜의 탄핵을 8:0으로 찬성한 것이다’라든가, ‘헤어롤의 모양이 ‘인용’의 자음 ‘ㅇㅇ’을 의미해서 탄핵이다!’라는 반응을 보였다. 설상가상 당일 국회식단이 잔치국수와 찜닭으로 밝혀지면서, 탄핵을 향한 국민들의 갈망이 한마음 한뜻으로 모인 듯 싶었다.

 

이정미 재판관, 출처: SBS뉴스


누군가는 이정미 재판관이 머리가 좋은 사람이라고 했다. 헌법재판관이니만큼 머리가 좋지 않을 리가 없겠지만, 급박하게 동그랗게 말린 그 ‘헤어롤’이 세월호 당시 박근혜의 ‘올림머리’를 비판하는 장치라서란다. 실제로 탄핵소추안에 ‘생명권보호 의무위반’과 관련된 사항도 언급되어 있었기에 그럴듯한 논리였다. 그런데 사람들이 생각하는 건 다 똑같다고, 대다수가 이러한 논리에 공감했고 박근혜를 비판하는 목소리는 헤어롤이 전하는 메시지와 함께 커져만 갔다.

 

11일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촛불집회에서 이정미 재판관을 패러디한 시민, 출처: 한국일보


하지만 한편으론 이 모든 현상이 씁쓸했다. 그 바쁜 와중에도 이정미 재판관이 뒷머리에 신경을 써야 한다는 사실이 까끌까끌했기 때문이다. 동그랗게 말린 헤어롤은 대학생 시절, 공연장 어셔(usher)로 일했을 때 뒤통수에 헤어롤을 달고 출근한 날을 떠올리게 했다. 당시 고대기를 할 줄 몰라 헤어롤을 대신 말았던 건, 며칠 전 센터장이 ‘여성 어셔들은 꾸미는 것도 예의야! 화장 좀 하고 다녀!’라고 민낯의 안내원을 혼내던 모습이 떠올라서였다.


해프닝. Happening. 우발적인 사건. 현대 예술의 각 분야에서 시도되고 있는 표현운동의 한 가지. 해프닝은 주제, 소재, 액션의 변화에 따라 여러 가지 형식으로 전개하여 이른바 예술과 일상생활과의 경계를 없애려는 것이 하나의 특색이다. 특히 미술에서는 화가의 제작 행위 그 자체를 하나의 표현으로 본다. 출처: 세계미술용어사전, 1999, 월간미술

 

지난 2014년 4월 16일 오후 (피의자가 될)박근혜씨의 모습, 출처: 한국일보

 
흥미롭게도 일 잘하는 여성을 대표하는 이정미 재판관과 일을 잘하지 못하는 여성으로 대표되는 박근혜씨의 공통점은 ‘머리를 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헤어롤’과 ‘올림머리’는 바쁜 와중에도 자신을 놓지 않는 워킹맘의 대표 격으로 칭송되거나 꾸미느라 일도 제대로 못 한다는 비난으로 이어져 사회현상의 단면을 드러내기도 했다. (물론, 국민의 생명권이 위협되는 때의 박근혜의 태도는 비난받아 마땅하다.) 

 


로버트 켈리 교수의 BBC 방송사고도 흥미로웠다. 그가 자택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사건을 리프팅하는 도중 자녀들이 방안에 난입해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연출한 것이다. 영상의 킬링파트는 여러 곳인데, 딸 매리언이 해맑게 춤을 추며 아빠에게 다가오는 모습과 동생마저 보행기를 타고 미끄러지듯 누나에게 다가오고, 잇따라 놀란 그의 부인이 방안으로 뛰어들어와 아이들을 보듬는데 “왜그래애~~”하고 우는 아이들의 모습이 그렇다. 아, 또. 침대 위에 책상처럼 연출한 전문서적들이 우수수 떨어지는 장면도. BBC NEWS의 진행자는 말을 더듬고, 연달아 로버트 켈리 교수마저 눈을 질끈 감는 모습이 너무나 재미있는 장면으로 연출됐다.

 

출처: 노컷뉴스


단순한 방송사고였지만, 파급력은 놀라웠다. 한껏 들뜬 아이의 춤사위가 사랑스럽다는 의견이 대부분이었지만, 영상이 급속도로 퍼져나가며 해외에서 ‘아동학대’와 ‘인종차별’논란이 발생한 것이다. 예상치 못한 아이들의 난입(?)으로 부인이 다소 거칠게 아이를 대했고, 특히나 아동학대문제에 예민한 외국인이 보기에 학대논란은 ‘그럴 수도 있다’치지만, 아시안 여성이 당연히 유모(nanny)일 것이라는 전제는 그리 달갑지만은 않다. 또한, 당황한 부인이 자세를 낮추고 방안에 들어온 것을 복종하는 자세와 연관하여 백인우월주의에 한껏 심취한 모습을 보고 있자니 반발심이 들기도 했다.

 

BBC interview Parody

 
반면, 어떤 사람들은 침대 위에 책으로 그럴싸하게 연출한 것을 보면 ‘로버트 켈리 교수는 바지를 입고 있지 않을 것이다!’고 했고, 난입사고를 패러디 하는 각종 영상들이 제작되기 시작했다. 부인 김정아씨는 BBC와의 재인터뷰에서 인종차별 논란에 ‘즐겨라!’고 답하기도 했지만, 오늘 열린 공식기자회견에서는 외국인 커플로 살며 받는 과한 관심과 아이들에 대한 질문이 힘들다고 말하기도 했다. 로버트 켈리교수는 ‘딸에 이어 아들까지 방으로 들어오는 순간 ‘이제 다 끝났다’는 것을 알았다’고 답해 웃음을 자아냈다. 

 


그렇다. 그들은 단지 헤어롤을 빼는 것과 문을 잠그는 것을 깜빡했을 뿐이다. 그만큼 일상에서 일어난 단순한 해프닝인데도 ‘이정미 헤어롤’과 ‘역대급 난입사고’는 계속해서 회자되고 헌재에서는 해당 헤어롤을 보관하겠다는 썰이 흘러나오며 때아닌 ‘인종차별’ 논란도 일었다. 단순한 해프닝에 불과하지만, 어찌됐든 그들의 행위는 의미가 있었다. 우리사회가 가진 여러가지 사회문제와 단상을 여과 없이 드러냈고, 탄핵 외에도 아직 해결해야 할 문제가 많다는 메시지를 전했기 때문이다.

 

로버트 켈리 교수와 그의 가족들, 출처: 부산일보

 
해프닝: 해프닝이란 ‘화가→실행→작품’으로 이어지는 예술과정 속에서 두 번째 요소, 즉 ‘실행’(perform)을 독립적 예술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중략).. 뿌리는 게 굳이 물감일 필요 없고, 깔린 게 굳이 화폭일 필요도 없다. ‘행동’은 어떤 재료로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것들은 쓰레기통, 범죄 기록, 호텔 로비 등에서 발견되며, 쇼 윈도나 거리에서 보이며, 꿈이나 끔찍한 사건 속에서 감각된다. 으깨진 딸기 냄새, 친구에게서 온 편지, 막힌 배수관을 뚫는 용해제를 판매하는 게시판, 노크 소리, 긁는 소리, 한숨 소리, 끝없이 책 읽는 목소리, 명멸하는 불빛, 중절모 등 이 모든 것이 이 새로운 구체적 예술을 위한 재료가 될 것이다.” 이로써 예술과 일상의 경계도 무너진다. 출처: 진중권의 현대미술 이야기(9) 해프닝 


그런 걸 보면, 예술이라는 게 따로 있을까. 단지 재료와 도구를 이용해 작품을 만드는 것 이상의 일상의 모든 것이 예술이 될 때도 있다. 적어도 3월 10일의 이정미와 켈리의 딸 매리언은 이날의 행위예술가였다.

김해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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