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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인의 인권’은 가볍게 사용할 수 있는 이미지가 아니다.

17.03.24 1

지난 2월, 프랑스에서 큰 사건이 발생했다. 프랑스 경찰관들이 22세의 흑인 청년인 ‘테오’를 검문하는 도중, 구타와 성적인 학대를 가한 것이다. 프랑스 시민들은 차에 불을 지르고 상가를 부수는 등의 격한 행위로 인종차별 행위에 답했다. 

 

사건에 대해 철저한 진상조사와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는 시민들의 모습, 출처: 연합뉴스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프랑수아 올랑드 대통령은 테오가 입원한 병원에 직접 방문하기도 했다. 경찰은 테오의 항문에 경찰이 들고 다니는 봉을 깊게 삽입하기도 했는데, “마약을 확인하기 위한 행위”라고 설명했다고 한다.

 

테오를 찾아간 올랑드 대통령


그러나 인종차별은 비단 어제오늘만의 일이 아니다. 아주 오래 전부터, 유럽이 강한 대륙으로 거듭나기 위해 아프리카에서 노예를 데리고 올 때부터 만들어진 편견인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흑인 인권 신장’을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그들에 대한 편견과 폭력이 사라지지 않는 것은 어떤 이유 때문일까? 단지 자신이 가진 것을 지키기 위해서 누군가를 짓밟아도 된다는 것은 너무나도 가혹한 일이다.


이미지로 재현된 노예선의 모습, 출처: blackchickrocked


어떤 교수님은 ‘자신이 겪지 않은 일을 작업으로 내어 그것을 마치 모두 이해하는 양’하는 것은 좋지 않은 작품이라 했다. 예를 들어, 자신이 빈곤하지 않으면서 빈곤층을 찍는다든가 여성의 어려움을 모르면서 여성의 어려움을 다루는 작품을 말한다. 그 때는 그 말을 정확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러한 왜곡된 이미지가 모여 사람들에게 ‘정확하지 않은 정보로 만들어진 이미지’를 각인시킨다는 것을 깨달았다. 즉, 작품은 우리에게 특정 대상에 대한 ‘포르노그래피’를 선사하기 때문에 그만큼 신중하게 만들어야 한다.

 

<열린 관(Open Casket)> 데이나 셔츠, 2016.

 

그리고 현재 진행중인 ‘휘트니 비엔날레(Whitney Biennial)’에서 이슈가 된 사건이 있다. 흑인을 다룬 작품이 논란의 도마 위에 오른 것이다. 논란이 된 작품은 그간 호평을 받고 있던 작가 데이나 셔츠(Dana Schutz)의 <열린 관(Open Casket)>(2016)이다. 해당 작품은 1955년에 미시시피에서 발생한 실제사건을 모티브 한 것으로, 백인 상점 주인이 15살의 에멧 틸(Emmett Till)이라는 흑인 소년을 죽인 사건이다. 정확한 사정은 알 수 없으나 주인은 틸이 자신의 아내에게 휘파람을 불었기 때문에 살인을 저질렀다고 했다. 사후의 틸의 얼굴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일그러져 있었다. (아래 사진) 그러나 가해자들은 무죄를 선고 받았다. 이에 틸의 어머니는 장례식에서 아이의 시신을 볼 수 있도록 관을 열어놓았다. 사람들이 틸의 죽음을, 그리고 이 폭력을 기억하도록 한 것이다.


에멧 틸 생전 모습(왼쪽)과 사후의 모습(오른쪽), 그리고 그의 어머니

 

몇몇 사람들은 이 작품을 그냥 지나쳤지만, 흑인 예술가인 파커 브라이트(Parker Bright)는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파커는 “BLACK DEATH SPECTACLE”이라는 문구를 적은 티셔츠를 입고 몇 시간 동안 그 작품을 가로막고 서있었다. 그의 모습은 트위터 및 SNS를 통해 전파되었고, 이는 ABC 뉴스에도 소개됐다. 휘트니 비엔날레의 큐레이터들은 이러한 상황에 대해 어떠한 대응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예술의 자유를 인정해서일까? 그것은 알 수 없다. 관련 기사 보기


Photo by Scott W. H. Young, via Twitter

 

그러나 이 젊은 작가가 분개한 이유를 정확히 알아야 할 것이다. 그는 해당 그림을 그린 작가가 ‘백인’이며 그녀가 어떤 깊은 숙고와 성찰을 통해 흑인의 모습을 작품에 담았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앞서 말했듯, ‘데이나 셔츠’는 미술계에서 인정을 받는 신예작가이고, 그렇기 때문에 그만큼 파워가 있다. 그렇다면 그녀의 작품에 등장한 ‘살해 당한 흑인’은 과연 어떤 의미를 지니는 걸까? 그녀는 작품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걸까.

 

영화 <문라이트>

사설에서는, 미술은 작가와 관람자의 자유를 인정하는 매체지만 어째서 작품에 ‘피해자’의 모습을 그려야 했는지 의문이라고 했다. “살해한 가해자들의 이미지는 어디에 있는가? 왜 그들의 이름과 사진은 미국의 정신에 아로새겨져 있지 않은가? 왜 작가는 가해자의 얼굴을 통해 미국 국민을 심문하지 않는가?“ 




정확한 질문이다. 작품 앞에 몇 시간을 서있던 파커 브라이트는 이러한 점을 제대로 꼬집었다. 그는 용기를 냈을 것이다. 작품에서 피해자의 이미지로 가볍게 사용하는 흑인 인권에 대해 분개했을 것이다. 영화 <문라이트>에서는 이런 대사가 나온다. ‘인류의 조상은 흑인이기에, 흑인은 어디에나 있다.’고 말이다.

영화 대사처럼 “달빛 아래에선 모두 블루(Blue)”인데, 어째서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만으로 판단하는 것일까? 인간의 무지와 이기심이란 실로 놀랍다. 아직도 우리는 ‘흑인’이라는 단어를 보면 공중에 흩어져 있는 이데올로기를 먼저 떠올릴 것이다. (미지의 세계, 억압의 세계, 척박함의 세계, 슬픔의 세계 같은 것들 말이다) 그러나 과연 그것이 진실일까? 그 단어만으로 흑인을 이해할 수 있을까? 미술은 사회와 결부되어 있다. 그리고 상당수의 작가는 진심으로 사회와 국제이슈에 대해 고민한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무엇이 옳은지’, 그리고 ‘무엇을 제대로 보아야 하는지’를 작가 스스로 최대한 고민해야 할 것이다. 또한, 작품을 고르는 큐레이터 역시 많은 담론을 고민해봐야 할 것이다. 미술은 평소에는 큰 힘을 지니지 않는 시냇물과 같다가도, 어느 순간에는 강력하고 거대한 태풍이 되어 우리에게 많은 생각을 안겨주기 때문이다. 

십사

안녕하세요, 십사입니다.
미술, 만화영화, 춤, 피천득님, 법정스님을 좋아합니다.
살아있음을 기쁘게 여기며, 지혜롭고 성실하게 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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