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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급’과 ‘저급’을 가르는 기준

17.04.03 1

<키스> 구스타프 클림트  

아름다운 그림, 재밌는 소설, 시각적으로 끌리는 디자인 등. 우리는 개인의 취향을 기준으로 좋아하는 문학과 예술 작품에 이러한 수식어를 붙이곤 한다. 미술관에 가도 현란하고 화려한 화풍에 매료되는 사람이 있는 반면, 과격하고 기괴스러운 작품 앞에서 찬탄을 금치 못하는 사람도 있다. 작품이 무엇을 의도하는지, 어떤 심미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는지 알지 못하는 사람이라도 본능적으로 끌리는 작품이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아무리 각기 다른 취향을 가졌을 지라도 열에 아홉이 열광하는 작품도 있다. 특히 미술은 시대마다 다수가 선호하는 양식이 존재해서 트렌드에 따라 하나의 사조를 형성하기도 한다. 이는 한 시대를 풍미하는 ‘미(美)의 기준’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절대적으로 양립할 수 없는 두 가지 시선이 있다. 바로 ‘대중예술’과 ‘고급예술’이다. 특히 19세기 서양미술을 보면, 근대로 이행하는 시기에 특정 계층들만 향유하던 문화예술이 점차 그 폭을 넓히면서 이 둘의 성격이 극명하게 갈리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다수가 열광하는 그림은 늘 보수적인 집단에 의해 멸시되고 저급한 예술로 취급당했으며, 고급예술은 유명 미술관의 축복을 받으며 언제나 상류 계급들의 지지를 받았다. 예술이란 모두 신성하고 고귀한 것 아니었나? 그렇다면 대체 대중예술과 고급예술을 가르는 기준은 어디에서 온 단 말인가.  


 

고급예술과 대중예술을 가르는 기준은 피라미드 속 계층에서 비롯한다, 출처: wikipedia

 

고급예술을 향유하는 사람들은 피라미드 구조의 꼭대기를 차지하는, 소위말해 상위 계층에 속하는 성직자와 귀족세력이었다. 이들의 관점에서 그림의 소재나 주제는 항상 신화적이어야 하며 도덕적 규범에 어긋나지 않아야했다. 때문에 고급예술 속 인물들은 하나같이 아름다우며 인간의 모습보다 신의 모습에 가까웠다. 대중예술은 고급예술과 반대로 소재 자체가 파격적이며 당대 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던 이슈를 모티브로 삼아 자극적이었다. 즉, 대중예술작품에는 당대 설정했던 규범에서 벗어난 여성의 이미지가 등장하기도 하고 대다수가 신성시했던 인물에 대한 풍자가 섞여 있기도 했다. 물론, 모두를 만족시킬 ‘절대적인 예술’이란 존재할 수 없지만 이렇게 양립할 수 없는 취향이 한 시대에 공존하고 있다는 사실은 새삼 새롭다.

 

<오필라아> 존 에버렛 밀레이, 출처: wikipedia


존 에버렛 밀레이의 <오필리아>는 셰익스피어의 비극 ‘햄릿’의 사막 7장을 그대로 화폭에 옮긴
작품으로 오필리아가 연인 햄릿이 자신의 아버지를 살해했다는 걸 알고 이승을 떠나려는 순간을 묘사했다. 이 시기 화가들은 세익스피어의 문학에서 모티브를 얻었는데, 특히 <오필리아>는 관능적인 여인의 모습이 두드러져 비극적인 장면을 부각한다.



<레이디 릴릿(Lady Lilith)> 단테 가브리엘 로제티, 출처: hugbear


단테 가브리엘 로제티의 <레이디 릴릿> 속 여인의 시선은 항상 아래를 향하거나 무언가를 뚜렷이 응시하고 있다. 붉은 입술과 풍성한 머리카락, 날렵한 턱선 등, 모두 기존에는 없었던 새로운 여인의 모습이다. 어깨가 드러난 옷을 입고 무심한 듯 자신을 꾸미는 여인들은 관람자에게 묘한 신비감을 부여한다.

 

<베아타 베아트리체> 로제티, 단테의 서사시
<신생(La Vita Nuova)>에서의 베아트리체 모습이다. 출처: wikipedia

 

<단테의 꿈> 로제티, 단테의 <신생>에서 모티프를 가져온 또 다른 작품이다.
임종을 앞둔 베아트리체에게 단테가 키스하는 장면을 환상적으로 표현한 이 장면은 실제 로제티 자신과 그의 연인 시달을 그린 것이기도 하다.

 

위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인물과 이야기, 문구는 당시 대중적인 소재를 지향했던 작가들이 의도적으로 꾸민 장치들이다. 19세기 영국의 대중은 문학이나 다른 예술 장르의 한 장면을 가져와 재창조한 미술에 특히 열광했으며, 관람자의 시선을 압도하는 팜므파탈의 여인에 매료되어 관능적인 여인이 모델인 그림을 즐겨보곤 했다.  
 

 

<비너스의 탄생(The Birth of Venus)> 산드로 보티첼리

<A Sea Spell> 단테 가브리엘 로제티

 옷을 다 벗고 있어도 어쩐지 야하다는 느낌보다 신성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비너스와 옷을 걸치고 있음에도 관람자를 유혹하는 시선으로 바라보는 관능적인 팜므파탈, 출처: hugbear & wikipedia    


1860년대 무렵부터 대중은 점점 더 소설과 시, 희극에서 따온 소재를 그림에서도 발견하길 원했다. 때문에 이러한 대중의 욕구를 반영하는 화가들이  많아진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예술가들은 자연스레 르네상스 이전 후원자에의해 제작 요청을 받고 그림을 그렸던 수동적인 ‘장인(Craft)’의 역할에서 벗어나 자율성을 얻었다. 어쨌거나 19세기 중엽을 풍미하던 그림들은 국가 차원에서는 용납할 수 없었다. 보수적인 왕립미술원에서는 이들이 반가울 수 없었으며, 이 같은 그림들은 저급하다는 이유로 배격당했다. 

 

<Annie Hicks> 조지 엘가 힉스

 

<엄마의 무릎 위에 앉아 회중시계의 똑딱거리는 소리를 듣는 소녀> 조지 엘가 힉스, 출처:artuk


위 작품은 상류층의 지지를 받았던, 고급예술에 속한 엘가 힉스의 작품이다. 직관적으로 우리는 이 그림에서 ‘이상적인 여성상’을 볼 수 있다. 그림 속 배경은 장식적인 요소가 없어 다소 단조롭고 차분한 장소를 암시하고, 여인들의 행동 또한 아이를 돌보거나 책을 들고 있는 등 ‘정숙한 여성’으로서의 모범을 보이고 있다. 관람자를 유혹하는 여인의 시선 대신 ‘도리를 다하는’ 현모양처의 이미지가 도드라지는 것이다. 앞선 그림과의 차이만 보더라도 당시 영국의 빅토리아 시대 여인들의 역할이 얼마나 한정적이고 억압되어 있었는지 유추할 수 있다.

 

<The Haymaker> 조지 엘가 힉스

 

<Woman’s Mission: Guide of Childhood> 조지 엘가 힉스, 출처: tate

 

아이러니 하게도 이러한 고급예술인 ‘힉스’의 작품들은 왕립미술원에도 전시될 만큼 상류층에게 인정받았지만, 정작 대중은 그의 작품을 알지 못했다. 물론, ‘취향의 차이’로 대변할 수 있는 이러한 현상은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익관계의 투쟁’과 다르지 않다. 자신이 처한 상황에 맞춰 지위를 유지하기 위한 세력과 그 상황을 역전하기 위해 발버둥 치는 세력 사이의 투쟁이 예술이라는 고귀한 이름 아래 가려진 것이다. 


한 시대를 지배하는 사회의 흐름을 읽고 역사의 관점에서 작품을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예술이 그저 아름답게만 보일리는 만무하다. 그 어떤 이익관계와도 무관한 절대적인 ‘예술’에 대한 찬양과 고귀함으로 인간의 취향을 포장하기엔 오늘날 예술이라 불리는 것들에 근거를 마련해줄 또렷한 지표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고급’과 ‘저급’이라는 이질적인 이 단어를 통해 실은 자신이 속한 계급의 굴레에 갇혀 내적 깊은 곳에서 끌리는 ‘진짜 취향’을 거부한 것은 아닐지 생각해보자.

이윤정(Lottie)

그림을 쓰고 글을 그린다.
아날로그를 사랑하다 디지털 시대의 위협을 받고 현대적인 것과 친해지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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