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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의 타임머신 놀이

17.04.06 0

왼쪽부터 윤동주, 백석, 황순원

 

학창시절, 국어 시간에 시를 배웠던 기억이 있다. 이제 와 생각해보면 교육방식이 참 이상했는데, ‘시 공부’랍시고 고작 했던 일이 유명시인의 시를 외어 읊조리거나, 선생님께서 시 몇 군데에 빵빵 구멍을 뚫어놓으면 “빈칸에 들어갈 알맞은 단어를 채우시오”라는 지시를 읽고 정답을 선택하는 전부였기 때문이다. 마치 ‘답정너’처럼, 시인이 시를 쓴 의도와 특정 단어가 의미하는 바를 수학 공식처럼 ‘딱딱하게’ 외울 수밖에 없었다.

 

국어 교과서 속 서시와 친필 원고, 출처: 알라딘 서재 

 

그래서 ‘시’가 재미없었다. 고작 단어 몇 개, 문장 몇 줄 모여 ‘시’가 되는 것만 같았다. 사람들이 그런 ‘고작 몇 줄로 만든 시’를 찬양하는 모습을 보면, 쉬이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데 어느덧 세상의 풍파를 겪고 나니, 학창시절 좋은 성적을 받기 위해 읊조렸던 시들이 불현듯 떠오르곤 했다. 가끔 기억을 더듬어 시를 찾아보면, 시는 조용히 다가와 마음을 위로했다. 다시 시가 좋아지기 시작했다. 주변을 살펴보니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나와 같은 이유로 여전히 시를 사랑하고 있었고, 각자의 마음을 달랠 시를 ‘여전히’ 찾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시선을 강탈하는 시집을 하나 만났으니, 바로 윤동주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다.

 

윤동주 사망(1945년) 후, 3년 뒤 세상에 출간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초판본(위)과 서거 10주기인 1955년에 출판한 증포판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서시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한국인이라면 모를 리가 없는 ‘윤동주’와 그가 쓴 <서시>가 특별하게 다가온 건, 이 책이 윤동주 서거 10주년을 기리며 출판한 증보판을 그대로 재현했기 때문이다. 디자인 측면에서는 지금으로부터 약 60년 전의 타이포그라피와 표지 디자인을 살펴볼 수 있다는 점이 흥미롭지만, 책을 펼쳤을 때 전해지는 특유의 감성은 말로 이루 표현하기 힘들만큼 감동적이다. 지금과는 많이 다른 세로쓰기와 맞춤법, 그리고 곳곳에서 고개를 내미는 한자까지. 현대의 표기법과는 다소 차이가 있기에 문자를 좇는 눈동자의 움직임이 서서히 느려진다. 하지만 그만큼 글자를 음미하는 시간이 길어지기에, 보다 천천히 시를 음미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혹자는 낯선 한자 때문에 시를 읽기가 힘들다고 말하기도 한다.)

김소월 <초판본 진달래꽃> 티저

김소월의 <진달래꽃>도 마찬가지다. 사실, 이 책을 통해 ‘소와다리’ 출판사를 처음 접하게 됐는데 <경성에서 온 소포>라는 패키지를 보고 망설일 틈도 없이 ‘어머, 이건 꼭 사야 해!’를 외치며 결제 버튼을 눌렀다. 때마침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는지 한참을 기다리고 나서야 패키지를 품에 안을 수 있었다. 만족도는 뭐, 말로 표현할 필요도 없이 감동적이었다.

 

김소월의 <초판본 진달래꽃> 출간을 기념해 진행한 '경성에서 온 소포', 출처: 알라딘 서재

 

마찬가지로 1925년에 출판한 <진달래꽃>이 거진 100년의 세월을 거치며 표기법에 많은 변화가 있었기에 <초판본 진달래꽃>은 내용과 활자, 그리고 디자인까지 초판 그대로 재현했다는 점이 의미 깊다. 무엇보다 시의 감동을 더한 건, 신간 이벤트로 진행했던 <경성에서 온 소포>다. 소포는 ‘1925년의 소월이 독자에게 책을 부친다’는 설정으로, 독자가 <초판본 진달래 꽃>을 주문하면 대한제국 시절의 우표가 붙은 경성우체국 봉투에 소월의 책(주문한 책)과 소월이 쓴 엽서가 동봉되어 배달된다.

 

<초판본 진달래꽃> 출판 기념으로 진행한 '경성에서 온 편지' 

여기 방금 인쇄된 시집을 받아든 김소월이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미래의 여러분께 책을 보냅니다. 소포를 부친 곳은 경성우편국, 소식을 전하는 엽서는 혼마치 풍경입니다. 경성은 서울을 말하는데, 조선시대와 제한제국 시절에는 한성이었으나 경술국치 후 경성으로 명칭이 바뀌었습니다. 혼마 치 역시 명동의 일제강점기 때 지명입니다. 이 또한 아픈 역사의 기록이지요. 소월의 엽서를 보시거들랑 후기에 기별 남겨주세요.

명시가 괜히 명시가 아니라지만, 시의 가치를 부가한 출판사의 창의력도 인상 깊다. 실제로 증보판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는 출판한 지 한 달 만에 15만 부를 판매했고, 서점 ‘알라딘’의 독자들이 선정한 <올해의 책 2016>에 당당히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또한, 꾸준한 판매에 힘입어 지난달(2017년 3월)에는 한자 독음과 현대 표기법을 적용한 <하늘과 바람과 별과 時> 미니어처 북을 출간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가슴을 울리는 건, 엽서에 적힌 소월의 물음 때문이다. 나는 그의 엽서를 받아 들고 한참을 먹먹하게 서있었다. 당장에라도 답장을 하고 싶었지만, 그와 나 사이에는 100년이라는 시간차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소월은 내게 물었다.

 

제 時(시)는 사랑을 받고 있나요.
그때쯤은 獨立(독립)을 했을런지요.

 

김해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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