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Column  /  십사

당신의 쓸모 없으면서도 쓸모 있는 인생을 위하여, 안규철

17.04.20 1

<아홉 마리 금붕어> 출처: 안규철 작가 홈페이지

 

1) 남편은 요즘 거의 매일 야근을 한다. 그래서 밤 11시가 돼야 남편의 얼굴을 잠깐 보고 이야기를 나눈다. 그리고 잠이 들고, 아침에 일어나면 남편은 울상을 하고 어제 벗어놓은 옷을 주섬주섬 챙겨 입는다. “다녀 올게”라는 짧은 인사와 함께. 이런 남편을 보고 어른들은 “우리 때도 모두 그랬어.”라는 짧은 위로로 ‘너만 힘든 게 아니니 버텨라’는 메시지를 전한다. 그럴 때마다 나는 가끔 이렇게 사는 것이 정말 잘하는 걸까는 생각도 들지만, 현실적으로 해줄 수 있는 조언이 없어 말을 아낀다. 남편과 나는 오늘도 쓸모 있는 인생을 위해 달린다.

 

2) 엄마는 기간제 인턴을 하는 나에게 인턴이 끝나면 아이를 낳으라고 한다. 아마도 나를 빼고 가족 모두가 아이를 염원하고 있는 것 같다. 원래 아이를 낳으면 아이를 키워주겠다고 말했던 엄마는, 요즘 자기가 하고 있는 일이 잘 되자 내게 용돈을 줄 테니 집에서 아이를 보라고 말한다. 아이를 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면서. 그러나 우리는 알면서도 모른다. 아이만 보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그리고 아이’만’ 보는 게 지금껏 이렇게 살아온 내게 얼마나 힘든 일일지 말이다. 마치 대통령후보들이 공약으로 내놓는 것과 별반 다를 게 없는 이야기를 가족에게 들으니 더 이상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졌다.

 

 

< 머무는 시간 II >

 

“저는 ~하지 않기를 선호합니다”


1853년에 발표된, 소설가 허먼 멜빌(Herman Melville)의 소설 <필경사 바틀비(Bartleby the Scrivener)>에서 주인 ‘바틀비’가 자주 말하는 문장이다. 바틀비는 월스트리트의 한 법률사무소에 필경사로 취직하는데, 주어진 업무인 ‘필사’를 하다가 어느 날부터 고용자가 업무를 지시할 때 “저는 ~하지 않기를 선호합니다(I would prefer not to)”라는 말만 반복하며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 안규철 작가의 작품에 대해 우정아 교수님이 언급하신 소설의 내용이 가슴 깊이 와 닿는다. 사실 바틀비의 말은 어떤 공격을 위한 것도, 싸우기 위한 것도 아니다. 그러나 현대사회에서 저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은 과연 얼마나 될까? 지금 우리가 사는 사회는 ‘무의미’를 찾는 것이 힘든 사회이기에, 바틀비의 말은 ‘일생을 거는 용기’가 있어야만 가능하다. 때문에 저 말을 보고 더욱더 치열하게 ‘무(無)쓸모’를 향해 나아가는 인생, 그 어떤 것에도 자신을 맞추지 않고 최선을 다해서 ‘쓸모 없음’에 대해 사유하는 인생이 떠올랐다.

 

안규철 작가의 작품을 보면 ‘최선을 다해서 쓸모 없음에 대해 사유하는 인생’이 보인다. 그리고 작가가 앞날을 모르는 오늘을 살기 위해 익숙하고 단조로우며 새롭지 않은 것들 안에서 인생의 의미를 꼬집어 낸다는 것이 느껴진다.

 

<두 대의 자전거>


<사물의 뒷모습>


…하지만 안규철은 보다 신중한 태도로 나아간다. 그는 사물을 약간 변형함으로써 기능 상실을 암시하고, 낯설게 만들고, 익숙한 것을 익숙하지 않게 만든다. 그의 목표는 아주 명료하다. 이 익숙하기 짝이 없는 사물의 일상적인 흐름을 눈에 보이고 경험할 수 있는 무엇으로 만드는 것이다, 출처: 보리스 그로이스, <무한한 현존>, 안규철, <안 보이는 사랑의 나라> (국립현대미술관, 2015), p.106. 

 

<과묵한 종>

 

안규철 작가가 작업을 하는 방식은 독일 출신의 유태계 지식인이었던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이 글을 쓰던 방식과 상통한다. 발터 벤야민은 공부만이 불행한 인생과 사회를 살아가고 버티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쓸모 없는 것에서 ‘쓸모’를 발견하고자 애썼다. 한편 벤야민은 자신을 한 분야의 어떤 사람으로 정하지 않고, 항상 글을 쓰면서 언어학자, 신학자, 번역가, 시인, 철학가 등의 역할을 수행했다. 그렇게 하면서 완성이 없는 어떤 과정들을 끊임없이 수행했고, 그러한 수행을 공부로 여겼다. 갈지자(之)로 이어지는, 한편으로는 방향성이 없어 보이는 인생의 길을 묵묵히, 그리고 치열하게 글쓰고 공부하면서 버텨온 것이다.

 

굶주림과 가난, 질병과 불행에 대한 두려움에서 자유로워지려면 일하는 수밖에 없다. (…) 역시 중증의 일중독자인 내 모습을 그린다면 이런 그림이 될 것이다. 나는 끊임없이 일하고 그 일로 인해 자유롭다고 생각한다. 그러다가 문득, 멈춰 서는 순간이 있다. 쳇바퀴 속의 다람쥐, 노역 중의 시시포스가 자신이 하던 일이 무엇이었는지 묻는다. 어떤 날은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출처: <노동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안규철

 

개념미술가 안규철, 출처: 아트뮤지엄

 

안규철 작가의 작품이 치열하게 공부하며 살았던 벤야민의 인생과 닮은 것은 무엇 때문일까? 그것은 둘 다 삶을 사는 ‘그 순간’에 최선을 다해 사유하고, 공부하고, 메모하며 글을 쓰는 삶이 닮아서일 수도 있다. 그리고 삶을 이어나가는 ‘찰나’와 ‘찰나’의 사이에 존재하는 쓸모 없다고 느껴지는 많은 것들을 다시 바라보면서 쓸모를 찾아내는 모습도 닮았다. 

 

이러한 안규철의 삶의 방식은 아버지에게서 물려 받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아버지는 소도시의 외과의사였는데, 항상 두꺼운 의학 서적을 필사하곤 했다. 그래서 그에게는 손으로 글을 써내려 가는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남아 있다. 그래서인지 작가 역시 글을 계속 쓴다. 작가는 꾸준한 글, 꾸준한 사유를 통해 ‘쓸모 없음’과 ‘쓸모 있음’ 그리고 찰나의 순간에 대해 생각한다.

 

<머무는 시간I>


나의 글쓰기는 물론 필사가 아니다. 나에게는 베껴 쓸 원본이 없다. 때로는 예전에 썼던 글을 나도 모르게 다시 쓰기도 한다. 쓰고 나면 지울 수 없는 잉크가 아니라 연필로, 쓰고 지우기를 반복하며 달팽이가 길을 가듯 더듬고 머뭇거리며 글을 쓴다. 쓰다가 막히면 그리고, 그리다가 막히면 쓴다. 되돌아보면 글자와 글자 사이에 내 생각이 지나온 궤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무엇 때문에 내가 작가인지를 누군가가 묻는다면, 연필을 들고 스케치북 위에서 보내는 이 시간 때문이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다.


대단한 소설가나 시인이 아니라도 글을 쓸 때 사람들은 모두 같은 모습이다. 어린 시절 책상에 앉아서 받아쓰기를 하던 그 진지하고 고독한 모습, 빈칸과 백지 앞에서, 텅 빈 우주를 홀로 마주하고 있는 모습이 그 안에 있다. 누구나 아기였던 때가 있듯이, 누구나 초롱초롱한 눈으로 글을 배우던 때가 있는 것이다, 출처: 안규철 <안 보이는 사랑의 나라> 작가노트

 

<세 개의 분수>

 

작가의 작품들은 앞으로도 뒤로도 갈 수 없는, 정지된 순간이다. 그러나 정지가 있기에 나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잠시 ‘정지된 순간’이 있어야 우리는 앞으로도 뒤로도, 혹은 옆으로도 갈 수 있다. 작가의 이러한 작업은 빠르게 변화하고 신속하게 일을 처리해야 하는 우리 삶에 잠시 여유를 준다. 그리고 이 작품들은 지난하고 고되고 반복되는, 어떤 미래도 보이지 않는 ‘지금의 삶’을 생각하게 한다. ‘더 이상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우리의 생각이 나쁜 것이 아니라고, 항상 쓸모 있어야만 쓸모 있는 인생은 아니라고 넌지시 메시지를 던진다.


나는 작가만큼 치열하게 고민하며 살고 싶다. 정답이 없고, 미래도 없고, 찰나의 순간들만이 존재하는 세상에서 그가, 예전의 발터 벤야민이, 그리고 소설 속의 바틀비가 해왔던 것처럼 가끔은 무능하게, 그리고 그 걱정과 불안을 생을 위한 공부로 풀어내며 살아가고 싶다. 마치 안규철 작가의 아버지가 살아온 무모하면서도 정직하고 뚝심 있는 필사를 하는 인생처럼 말이다.

 

십사

안녕하세요, 십사입니다.
미술, 만화영화, 춤, 피천득님, 법정스님을 좋아합니다.
살아있음을 기쁘게 여기며, 지혜롭고 성실하게 살고 싶습니다.

1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