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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에도 우위가 있을까?

17.05.18 4

얼마 전, 예술을 사랑하는 모임에서 소설과 영화를 두고 작은 싸움이 발생했다. 소설을 원작으로 제작한 영화가 소설에 비해 재미가 없어 매우 실망했다는 넋두리였다. 그는 원작을 영화로 재현했을 때 만족했던 적이 없으며, 영화로는 결코 소설의 이야기를 담아낼 수 없다고 말했다. 그러자 다른 한 분이 말하길, 자신은 무엇이든 간에 지루한 글자보다는 영상에 더 끌리고 그만큼 시각적인 매체가 훨씬 매력적이라고 했다. 그에겐 장면 하나하나가 생생하게 전달되는 영화가 책을 통해 펼치는 상상보다 흥미로운 것이다. 이 두 사람의 치열한 공방은 점점 "어떤 예술이 더 우위에 있는가"에 관한 문제로 이어졌다.

 

위대한 개츠비(The Great Gatsby), 출처: https://goo.gl/BHFZ2X

 

사모트라케의 니케,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발레수업, 출처: 위키피디아

간단히 생각해보면 소설, 회화, 조각, 연극, 음악은 모두 '예술'이라는 큰 범주에 해당하므로 무엇이 우위에 있는지 굳이 따질 필요가 없다. 하지만 정말로 그럴까? 각각의 예술은 한 번도 서로를 의식하지 않은 채 오로지 자신들의 자리에서만 홀로 성장해 왔을까.

우선, 정답은 '그렇지 않다'이다. 예술이 존재하는 순간부터 21세기인 오늘날까지, 사회라는 거대한 장(場)안에서 표현하는 방식과 형태만 달랐을 뿐, 각각의 예술은 서로에게 자극제가 되며 공생해왔다. 이번 글은 그 중에서도 미술, 즉 '회화(fine art)'의 입장을 대변하여 미술이 다른 예술과 겨뤘던 행보를 이야기하고자 한다.

 

# 문학이 우위에 있던 시기 

유명한 미술 비평가 클레멘트 그린버그(Clement Greenberg)는 자신의 저서 〈더 새로운 라오콘을 향하여에서 시대마다 주도적이었던 예술이 존재한다고 말했다. 그에 의하면 17세기만 해도 예술 장르 중 가장 우위를 차지한 것은 ‘문학’이었으며 당시의 회화는 그것을 모방하는 것이 관례였다. 때문에 그림은 작가의 '생각'을 담기보다 문학의 일부를 가져와 재현하는 방식으로 제작되었다. 따라서 우리가 오늘날 고전이라 부르는 작품은 대부분 이 시기의 미술일 것이다.


<실레노스의 승리> 니콜라 푸생,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성녀 엘리자베스와 세례 요한이 함께 한 성 가족이 있는 풍경> 푸생, 17c,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시인의 영감> 푸생, 1629,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니콜라 푸생은 고전 텍스트와 신화, 전설, 성서의 이야기들을 주제로 역사화를 그렸다. 그의 그림들은 주로 전투하는 장면, 영웅의 승리를 묘사하고 있으며, 종교를 주제로 한 것이 대부분이다. 작품 <시인의 영감>에는 음악과 시의 신 아폴로, 서사시의 뮤즈 칼리오페, 시인 등이 등장한다. 이처럼 신화의 한 장면이나 소설 속 사건을 그대로 화면에 옮긴 회화는 보는 이로 하여금 실제 장면과 혼동하게 한다. 즉, 2차원의 평면에 불과한 캔버스에 실제 인물들이 존재하는 것만 같은 '환영효과'가 생긴 것이다. 때문에 회화는 화면 속 인물이 문학에 등장하는 '인물'과 얼마나 일치하는 지가 기준이 됐고 그 이야기를 얼마나 생생하게 재현했는지가 관건이었다.

 
# 시는 회화처럼’ 우트픽트라포에시스(Ut Pictura Poesis)

<눈 속의 떡갈나무> 카스파 다비드 프리드리히,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해변의 수도승> 프리드리히, 1809,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아침> 프리드리히, 1820-1821,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고대 그리스 시인 시모니데스(Simonides)는 “회화는 말 없는 시고, 시는 말 없는 회화”라고 했다. 또한, 로마의 시인 호라티우스(Horatius)는 “시는 회화처럼(Ut Pictura Poesis)"이라며 시를 회화에 빗대는 유명한 말을 남기기도 했다. 그 외에 '매체는 구구절절 하다',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관객에게 직접 닿아야 한다', '그 가운데 매개체는 이 둘 사이의 간극을 좁혀야 하며 그것이 임무다'라는 '낭만주의 예술론'의 관점이 있다. ‘낭만’이란 말이 흔히 쓰이는 요즘이기에 단어의 정확한 의미를 파악하는 게 어렵지만, 간단히 말하자면 여기서의 ‘낭만’은 문학을 따라 하지 않고 예술가의 감정과 느낌 자체를 중시하는 태도다. 때문에 이들은 타장르를 모방하려고 애쓰지 않으며, 오로지 감정의 전달을 목적으로 한다. 지금에야 프리드리히(Friedrich)의 작품이 흔한 풍경화라 대단하게 느껴지지 않을지 모르지만, 당시에는 그의 작품이 ‘시처럼’ 관람자와 화가 사이에 감정의 교류를 발생하게 한다는 점에서 새로운 시도였다. 오로지 화가의 감정만을 전달하는 이러한 작품은 여느 신화의 이야기와 역사적 사건의 개입으로부터 자유롭다.

 

# 화면 속 리듬감, 음악을 모방하기

문학이 '텍스트'를 기반으로 한다면 회화는 '캔버스'를 기반으로 한다. 회화는 좀 더 '순수한' 자기 만의 정체성을 찾고 싶었다. 그래서 캔버스에 어떤 대상도 표현하지 않고 오로지 감정만을 전달하는 방법을 택한다.

 

<원 속의 원> 간딘스키, 출처: http://zetawiki.com

 

그 결과, 20세기 아방가르드 시기에 이르러 회화가 음악을 모방하기 시작한다. 여기서 말하는 ‘음악의 모방’이 결코 개구리 소리나 천둥소리를 시각적으로 재현한 것은 아니다. 아방가르드 회화가 모방하려는 음악은 형태적으로 재현할만한 대상이 없음을 의미한다. 즉, 재현이 불가능한 예술의 특성 그 자체를 따르려는 목적이다. 20세기 순수회화를 지향하는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은 '음악'이라는 장르를 모방과는 동떨어진, 그 자체가 가진 매체의 물리적 성질이 온전히 드러나는 예술로 보았다. 음악은 관람자로 하여금 완전히 몰입할 수 있게 하는 힘을 가진 것이다.



<작은 세계들 IV> 간딘스키, 1922,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마음 속의 축제> 간딘스키, 1942, 출처: http://pinterest.com

 

 <몇 개의 원> 간딘스키, 1926,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이 시기의 대표적인 작가는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다. 그는 음악을 가장 순수한 형태로 봤으며, 이러한 순수성을 획득함으로써 미술이 가진 매체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다고 믿었다. 따라서 다른 예술을 우위에 두고 모방하려는 미술 대신, 해당 매체에 더 가까워질수록 '순수성'을 획득한다고 생각했다.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은 이러한 순수성의 획득 여부가 독자적인 회화의 상징이라 여겼다.


< Black in Deep Red> 1957

 

<Blue and Gray> 1947

 

<무제 (Yellow, Orange, Yellow, Light Orange) 1955
출처: http://www.markrothko.org

 

이제는 평평한 회화에서 그 어떤 깊이감을 찾을 수도, 이야기를 발견할 수도 없게 됐다. 이것이 진짜인가 아닌가에 대한 궁금증 또한 있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매체 그 자체를 강조하기 위해 마크 로스코의 작품처럼 물감을 최대한 얇게 칠하거나 단순한 색채와 톤으로 캔버스를 장악하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아예 돌, 나무 등 작품을 이루는 매체의 특성만을 강조해 ‘감각’만을 전하려는 작품들도 많다. 그런 작품 앞에서는 2차원의 평면에서 3차원의 공간을 보는 착각과 환영 따위는 있을 수 없다. 우리가 봐도 잘 이해하지 못하는 '추상회화', '추상표현주의'와 같은 그림들은 이러한 이유로 탄생한 것이다.

 

<Wu Zei> Huang Yong Ping, 출처: http://plainmagazine.com


<LOVE> sudarshan shetty, 2006, 출처: http://www.aestheticamagazine.com


복잡다단한 현대미술 작품들을 보면 알 수 있듯, 지금의 미술은 과학기술까지 동원해 기이한 형태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만큼 회화와 문학, 음악, 연극 등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속도 빨라지고 있다. 때문에 이제와 '순수한 매체’가 무엇인지 주장하는 일은 고리타분한 주제로 들리기까지 한다. 하지만 우리는 예술이라는 큰 범주에 속한 각각의 장르들이 서로를 비교우위에 두며 알게 모르게 의식하던 때가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것은 동시대 미술에서 보이는 허물어진 경계가 하나의 역사로 만들어진 자취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러한 현상에 이르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렇다면 이제, 자신이 아직까지도 미술이 그저 '물감이 칠해진 캔버스'로만 한정하고 있지는 않은지 자문해보자!

이윤정(Lottie)

그림을 쓰고 글을 그린다.
아날로그를 사랑하다 디지털 시대의 위협을 받고 현대적인 것과 친해지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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