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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 북 리뷰] 한국, 여성, 그래픽 디자이너 11

18.03.23 0

크리에이티브 네트워크 <노트폴리오 매거진>에서는 디자인에 관한 다양한 시선을 비추기 위해 디자인 북 리뷰를 기획했습니다. 책을 통해 낯선 디자인을, 세상을 보는 다양한 시선을 접해보세요.

 

한국, 여성, 그래픽디자이너11

<한국, 여성, 그래픽디자이너 11> 


고민 끝에 학부 전공을 버렸다. 이유야 밤새 토로할 수 있겠지만 ‘먹고 살기 힘들어서’가 주된 이유였다. 요즘 같은 시대에 ‘평생직장’이 어디 있으며 ‘누구나 다 그러고 산다’지만, 여기에는 전제 조건이 하나 따른다. 바로 ‘여자로서’다.

그렇다. 이대로라면 진짜 먹고 살기 힘들 것 같았다. 업계 특성상 월급이 쥐꼬리만 했는데도 선배 기자 대부분은 밤낮 없이 일했다. 동시에 그들에게서 성별로 발견되는 공통된 특징이 하나 있는데, 남자선배들은 결혼을 꿈꾸거나 이미 했다는 사실이고, 여자선배들 중엔 결혼한 사람이 없었으며 그마저도 무한정 미룬다는 점이었다.

 

<이제 다른길이 열리겠다> 박수진, 이재원


이재원
아, 이런 이유도 들은 적이 있어요. 여성 디자이너보다 남성 디자이너를 선호하는 이유 중 하나는 가족
을 부양해야하기 때문이라는 것. 남성이 직업을 선택할 때는 가정생활과 병행이 가능한지 여부를 따지지 않는 편이잖아요. 그런데 여성은 그런 기준이 작용하죠. 그만큼 직업을 선택하는 폭이 좁다는 거고요. p.197 <일하는 여성에게 필요한 것>

맛깔손 대부분의 여성 디자이너는 결혼을 선택하면서 프리랜서로 활동하거나 디자이너를 그만두거나 유학을 가거나 해요. 단정할 수 없지만 그렇게 세 가지 부류인 것 같아요. p.55 <87년생, 우리의 그래픽 디자인>

 

부끄럽게도, 처음에는 이러한 경향이 자신의 가치관이나 소신을 전달하는 직업의 특수성 때문이라 생각했다. 말이 좋아 ‘특수성’이지, 막말로 ‘여(女)기자는 너무 세서 받아줄 남자가 있을까?’라는 편견이었다. 나 자신도 같은 판에 발을 들여놓고서는 ‘노처녀 히스테리’라거나 ‘결혼 안한 여자’에게 씌우는 프레임(기가 세다, 결혼을 ‘안’한 게 아니라 ‘못’한 거다)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인 것이다.


 

맛깔손 다는 아니지만, 성공한 여성 디자이너 모델을 보면 대부분 아무런 문제없이 너끈히 해낸 것처럼 어필하는 것 같아요. 왜 안 힘들겠어요. 여자로서 딜레마가 대단히 많을 텐데요. 힘들다고 말하면 나약해빠졌다는 눈치를 받을 테니 그렇겠죠. 근데 아이러니 하게도 저 또한 그런 이미지와 멘탈을 자연스럽게 장착하는 것 같아요. ‘나는 팀장이야.’, ‘밤을 새워도 괜찮아’라고 힘들지 않은 것처럼 최면을 걸어요. 일종의 정신승리 같은건데... 저도 보고 배운 게 있어서 흉내를 내는 건지, 뭔지 잘 모르겠어요.

맛깔손 또 의외로 높은 자리까지 올라간 여성분들을 보면 여성 디자이너보다 남성 디자이너를 더 선호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아요. 여성이 여성을 대하는 태도에 대해 생각해보면, 그들이 스스로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며 살아왔기 때문에 자신과 같은 여성 후배들에게도 엄격해지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해요. 아마 자기 자신은 ‘보통 여성’과 다르다고 생각하는 게 아닐까요. 여자는 야근할 때도 집에도 빨리 보내줘야 하고, 금방 그만둘 거라고 치부하는 편견이 여전히 남아 있는 것 같아요. p. 59 <87년생, 우리의 그래픽 디자인>

 

 

그러던 어느 날, 미래를 생각하니 암담했다. 당시에는 결혼이 한 해가 지나면 한 살을 먹는 것처럼 당연한 일이었기에 더욱 그랬다. 으레 직장이라 하면 ‘9to6근무’라는 전제를 따르는데, 내가 결혼을 하면 집안일은 어떡하지? 그럼 뭐, 남편이 ‘도와’주겠지. 그런데 애라도 낳으면 어떡하지? 사람들이 태어나고 2년 정도는 엄마가 봐야지 정서적으로 안정이 된다던데... 그럼 육아휴직이 가능한 직장에 가야하나? 그런데, 업계특성상 그건 불가하다. 게다가 육아휴직을 한다한들 계속해서 커리어를 쌓을 수는 있을까. 그러다가 둘째라도 생기면? 진심으로 4년 동안 공부했던 신문방송학을 사랑하고 좋아했는데, 현실 앞에서는 ‘교사’ 혹은 ‘공무원’이라는 직업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

 

 

오새날 사실 이전에는 결혼과 육아에 대한 환상이 좀 있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육아와 일을 동시에 해내는 일이란 정말 힘든 것임을 깨달았어. 그리고 결혼은 그냥 환상 속으로 넣어둬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지. 결혼을 하고 육아까지 하게 됐을 때 이런 회사에 다닐거라는 보장은 없잖아. 그러니까 내가 결혼 후 출산과 육아를 겪으면서 어떻게 경력을 이어나갈지에 대한 질문에 대해서는 여전히 답을 낼 수 없는 문제로 남아 있는 거지. p.212 <우리는 막차도 못 탔지만, 새로운 것을 만들어 갈 수 있다> 

박연미 저는 주변에서 출산휴가 후 복귀해서 워킹맘으로 열심히 회사 다니는 사람들도 많이 봤어요. 집에 가서 아이를 돌보고 집안일을 병행하는 거죠. 그 와중에도 결국에는 아이를 봐주는 조부모님이 안계시거나 도와주는 분 없이 혼자 돌봐야 하는 상황이 오면 당연히 여성이 회사를 그만 두겠죠. 그런 경우도 많이 봤고요. 여성의 삶에서 결혼까지는 별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는데, 출산을 하게 되면 거기서 선택해야 하는 시점이 오는 것 같아요. 아무리 가사노동을 분담해도 육아문제에서 남성과 여성이 동등하긴 어려운 게 현실이죠. 여자가 일을 그만두는 시점이 결혼보다는 육아와 직결돼 있고, 자연스레 35살 이후 현장에서 일하고 있는 여성 선배를 만나는 게 쉽진 않은 것 같아요. <35살 이후, 여자 선배가 없다> p.244

 

 

이 쯤 되자, 어릴 때부터 주구장창 듣고 자랐던 ‘여자가 하기 좋은 직업’이 떠올랐다. 교사, 공무원 같이 육아휴직도 쓸 수 있고, 퇴근 시간이 빠르면서 돈벌이도 괜찮고, 이미지 또한 나쁘지 않은 직업리스트 말이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여자가 하기 좋은 일’이란 수식어는 상당히 폭력적이다. 기존에 여성이 담당하고 있는 육아와 가사 업무를 폄하하는 동시에 여성의 노동력과 경제력을 착취하고, 완벽함(집안일도 잘하고 돈도 잘버는 여자)을 강제하기 때문이다. 사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여자가 하기 좋은 직업’이란 말에는 청소나 빨래, 음식하기와 같은 가사 업무를 돌볼 수 있는 충분한 ‘시간’과 근로시간 대비 ‘수입’도 꽤 짭짤한 노동이라는 의미가 녹아있지 않은가.

 

 

이나미 게다가 요즘 같은 경우에는 부부가 같이 벌지 않으면 혼자서는 정말 힘들어요. 같이 일하고, 집안일도 같이 나눠서 하고, 같이 행복하게 지내고, 이런 방법을 찾는 것에 대한 자기 몫을 해야만 해요. 그런데 사람들의 생각이 바뀌지 않으면 여자들은 갑자기 슈퍼우먼이 돼야 할 것 같은 또 다른 문제가 생기죠. 같이 노력하는 게 중요한데.. 사람들은 어째서 이 ‘함께’, ‘같이’라는 개념을 이해하는 걸 힘들어 할까요? p.145 <우리에겐 언어가 필요하다>

이재원 윤택한 삶을 위해 여성들의, 가족 내 무보수 노동을 전통적인 현모양처 관점으로 합리화하면서 말이죠. 어찌 됐든 저나 남편을 대신해서 누군가 가사 일을 한다면 그 사람은 대체 누구일가요? 시댁 어머니? 친정 어머니? 외국 여성? 어쨌든 여성일 것 같네요. 게다가 여성의 노동일 수밖에 없는 가사와 육아는 문화적으로 업신여겨지고, 경제적으로도 보상받지 못하고, 여성에게 일방적인 헌신을 강조하는 측면은 크죠. p192 <가족 안에서의 편견>

 

 

이러한 맥락에서 조금만 나아가면 ‘경력 단절’을 떠올릴 수 있다. 맞벌이 수입보다 입주도우미의 급여로 지출하는 비용이 클 때, 혹은 내 아이를 다른 사람 손에 맡기기가 꺼려질 때 일을 그만두는 쪽은 남성보다 여성 쪽이다. 또한 대부분 여성이 가진 직업을 ‘자아를 성취하고 자존감을 얻는 창구’보다 단순히 ‘돈을 버는 도구’로 치부하여 폄하한다. 때문에 일을 그만두는 여성은 퇴사가 하나의 자아를 상실하는 일임에도 단순히 통장에 찍힌 숫자대비 가사의 효용성을 이유로 자신의 퇴사를 쉬이 수긍하게 된다. 생애주기별로 살펴봤을 때 이는 20대 후반~30대 중반에 발생하며, 거의 모든 산업 분야에서 일어난다. 

 

 

김현미 저는 결혼했을 때 시어머님이 “너는 그냥 조금만 벌어”라고 말씀하신 게 너무 섭섭했던 기억이 있어요. 일을 한다는 것이 집에 돈을 가져오기 위해서만이 아닌데 말이죠. 그러니까 조금만 벌라는 것은 제가 가정에 충실하길 바라는 마음이 있으셨던 거죠.

구자은 저희 친정 엄마는 일하는 것을 응원하시면서도, 동시에 제가 아기를 못 키우는 것에 대해 큰 아쉬움을 가지고 있으세요. 엄마는 저희 남매를 키우면서 너무 행복하셨대요. 저도 지금처럼 사회생활과 육아를 병행할 수 있는 상황에 감사하고 즐겁다는 생각이 들다가도, 어느 때는 문득 지금 내가 뭘하고 있는 건가. 아이는 날 기다려주지 않는데, 내가 정작 이 시기에 가장 중요한 걸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불안한 마음이 들어요. 평소에 안 그러던 아이가 출근길에 울며 제 다리를 붙잡고 같이 나가자고 할 때 특히 그렇죠. 아이를 울리면서까지 출근하는 게 맞는 건지 되돌아보게 돼요. 마음이 동요하죠. 남자 그래픽 디자이너였다면, 이런 고민은 안 했겠죠. p.268 <여자는 조금만 벌어도 된다는 생각>

 

 

문제는 국가적 차원에서 해결해야할 육아와 노동의 담론을 단순히 여성에게 모든 책임을 전가하는데 있다. 때문에 사회는 거지같은 가부장제를 등에 업고, 계속해서 여성에게 ‘모성애’를 강제한다. 사실, 모성애를 강요하는 것이 사회를 유지하기 더 편하다. 계속해서 벌을 주고 때리면서 목표를 달성하는 것보다 의식을 장악해서 스스로 움직이게 하는 것이 더 나으니까. 그래서 사회는 끊임없이 ‘엄마니까 육아를 해야 해’, ‘엄마니까 집안일을 해야지’라는 ‘여성성’을 강조한다. 때문에 나 역시 무의식적으로 강요된 모성애에 의해 직업선택에 있어 ‘여성이 하기 좋은 일’을 먼저 떠올렸던 것이다.

 

 

박연미 출산이나 육아문제는 여성만의 문제가 아니잖아요. 분명 사회나 국가가 기본적으로 감당해줘야 하는 부분이 있고, 요즘처럼 저출산 시대에는 특히 더 중요하죠. 그런데 그 문제를 여성 개인이 너무 많이 지고 있는 구조인 것 같아요. 예전에 회사에서 한 이사님이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는데 한글을 완전히 떼지 못했다”고 말씀하시며 퇴사하는 경우를 봤는데 깜짝 놀랐어요. 그 말에는 ‘내가 직접 보살피지 않아서’가 자의든 타의든 생략돼 있던 거고요.

박연미 남편과 아내 모두 똑같이 일하는 상황인데 과연 남편은 아내만큼 생각할까요? 우리 사회의 가부장적인 분위기가 여자라는 존재를 그런 모습으로 만든 것인지, 아니면 일부만 그런건지. 사회가, 혹은 남성이 어떤 여성상을 강요하는 문화가 싫어요. 모성애는 경험상 존재한다고 보는데, 그냥 여성으로서 엄마로서 본인이 선택하면 되는거죠. 모두가 그래야 되는 건 아니 잖아요. p. 245 <35살 이후, 여자 선배가 없다>

 

그리고 난 결국 ‘여자가 하기 좋은 직업’을 가지게 됐다. 아마 결혼을 한다면 육아와 가사를 돌볼 만큼 충분한 개인 시간이 있을 테고, 노동시간 대비 수입도 꽤 짭짤할 것이다. 나름 전문성도 있어 경력단절의 부담도 없다. 아마 나는 ‘결혼하기 좋은 여자’일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타이틀이 껄끄러운 건, 진정 내가 원하는 직업이라기보다 무의식중에 강요된 여성성과 모성애에 의해 선택한 직업이라서다. 그렇다면 진짜 ‘나’는 무슨 일을 하고 싶었을까.

 

한국, 여성, 그래픽 디자이너 11, 출처: https://tumblbug.com/6699press

 

<한국, 여성, 그래픽디자이너11>은 단순히 여성 디자이너의 고충을 다룬 책은 아니다. 한국에서 직업을 가진 여성이라면 누구나 경험할 수 있는 실제적인 이야기를 다뤘다. 책은 마치 기존의 페미니즘 이론서적들이 다루는 개념들을 살갗에 닿는 이야기로 풀어놓은 느낌이다. 이상하게도 ‘페미니즘’에 반발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팽배하지만, 실상 ‘페미니즘’은 별개 없다. 여성으로서 사는 이야기, 그 안에서 벌어지는 불합리함과 무의식적 강요를 깨닫는 것이다. 나아가 우리 사회가 당면한 저출산 문제를 해결할 근본적인 담론이다. 굳이 디자인 업계에 종사하지 않는 사람이더라도 꼭 한 번 이 책을 읽어보았으면 한다. <한국, 여성, 그래픽디자이너11>은 동시대를 사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다.


제목 한국, 여성, 그래픽 디자이너 11 
출판사 6699PRESS

김해인

읽는 사람이 즐거운,
언제나 유쾌한 글을 쓰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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