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Chan’ 할아버지의 그림일기

18.09.07 0


어릴 적 나는 아빠의 수첩을 즐겨 봤다. 아빠가 수첩에 끄적거린 컬러풀한 그림과 이해하기 어려운 몇 문장의 시가 좋아서였다. 물론 그가 어떤 마음으로 시를 썼는지, 그 그림을 왜 그렸는지 정확히 이해하기 힘들었지만, 형형색색의 싸인펜으로 칠한 그림들은 왠지 모를 심리적인 안정감을 주었다.

이제 알뚤은 중학생이다. 알뚤에게 축하 선물을 뭘로 할까 지금까지 생각하다가 생각한 것은 예쁜 물고기 그림이다. 할아버지는 알란과 함께 방에 걸어놓고 보기 바란다. 내 옆에서 할머니는 폴 빌라드의 《이해의 선물》이라는 소설을 꼭 읽으라고 한다. 열대어 나오는 소설이래. 나도 궁금해서 읽어야겠다.

며칠 전 신문에서 너무도 놀라운 기사를 읽었어. 아프리카 대륙 한 복판에서 살아오던 마지막 수컷 <북부 흰코뿔소> 수단이 숨을 거두었다는구나. 얘들아, 사람들의 욕심때문에 많은 동물들의 수가 줄어드는 거야. ‘동물의 멸종위기!’ 말은 자주 들었지만 마지막 한 마리라니! 힘이 넘치는 얼굴로 묵직하게 버티고 서있는 멋진 모습을 그리고 싶었다.


그리고 찬(Chan) 할아버지의 그림을 봤을 때, 아빠의 수첩이 떠올랐다. 아주 디테일 하지는 않지만 알록달록하고, 그래서 정감이 느껴지는 그림들. 어쩐지 기시감이 느껴지는 그림 속에는 세상을 바라보는 할아버지의 따듯한 시선과 인생이 담겨있었다. 마치 내가 어렸을 때 훔쳐보았던 아빠의 수첩 속 그림들처럼, 특별할 게 하나 없지만 심신의 안정을 주는 색채와 이야기를 담고 있던 것이다.

 

 

Umbrella (Rainy Day Walk)

혼자? 아니 둘이 걷는다. 비 오는 날. 한 우산 쓰고 형제가 집으로 돌아온다.
비는 내리지만 이것저것 볼 게 많은 형과 아우, 뒷모습이 정답다.

 

Two Brothers

알뚤과 알란, 너희들이 5학년, 4학년 <잘딩 쌍빠울로 학교> 다니던 때,
할아버지가 등하교 시켜주던 때. 그 때 모습이다.
형과 동생이 어떤 것인지 고스란히 느끼게 해주는 뒷모습, 보기만해도 흐뭇하다.
알뚤은 불과 한 살 반 형인데도 동생 알란의 모든 것을 도와주었지.
알란은 형이 얼마나 든든했을까!

눈치 챘을지도 모르겠지만 할아버지의 그림이 유독 따스한 이유는 그가 가족, 그 중에서도 손주들을 위한 그림을 그리기 때문이다. 무려 42년생이라는 적지 않은 나이지만, 할아버지는 인스타그램을 통해 매번 자신의 작업을 선보이고 있다.

 

Hello, I'm a 76-year-old Korean grandpa with three grandchildren: Arthur and Allan, who are 14 and 13 live in Korea, and Astro who's 3 lives in New York. I learned Instagram to draw for them everyday. Grandma (@curious_marina) writes the stories.

그는 1981년 가족과 함께 브라질로 이민 후 30여년 동안 여성의류업종에서 일했고, 은퇴한 후에는 두 외손자의 등하교를 5년 동안 도맡다가 딸 가족이 한국으로 떠난 이후 집에서 TV만 보며 무료하게 시간을 보냈다. 이를 지켜보던 아들 이지별은 아버지가 그린 그림을 SNS에 공유하자고 제안했고, 긴 설득 끝에 2015년 4월 인스타그램에 첫 그림을 올렸다. - <매거진b>vol.68

 

애기가 잔다. 아로가 곤하게 자고 있다. 평화가 아로를 감싸준다.

새해 첫 아침, 한복을 입은 한국의 어린이들은 두 손과 머리를 바닥에 대고
"할아버지, 할머니 복 많이 받으세요." 라고 말을 한다.
아로도 아빠 엄마한테 배워서 이렇게 절을 했다.
"그래. 아로도 새해 복 많이 받아라."
한국의 오래된 전통 인사 '세배'라 한다

공룡 좋아하는 아로가 드디어 공룡과 친구가 됐네!
그리고 두 형을 불러 같이 놀자고 한거지? 미끄럼타려고 하네!
아로는 좀더 가파른 쪽으로 타고 싶대. 형들은 "안돼! 이쪽이야!" 붙잡고 싶은거지.
공룡은 아이들이 위험하지 않게 가만히 서 있구나.

한국의 겨울은 춥기만 한 것이 아닌가보다.
눈 내린 언덕에서 썰매를 타는 재미는 새로운 체험이었을 게다.

 

아로야, 강아지들이 귀엽지? 한국에 와서 보니 사람들이 강아지들을 진짜 많이 키우는것 같아서 한번 그려봤어. 그리고 올해는 개의 해거든! 아로야, 얘네들한테 이름을 지어주면 어떨까? 아로 너한테만 살짝 말하는건데 할아버지는 공룡보다 개를 더 좋아한단다. 너와는 다르지?

브라질의 이구아나를 실제로 본 적이 있니?
너희 형제가 동물을 좋아하니까 나도 관심이 깊어진다.
너희한테 배우는것이 많다. 때때로 너희는 할아버지 할머니의 선생님이란다.

작은 개 한 마리가 길 한가운데 있지? 오늘은 놀라운 이야기 하나 들려줄게. 한 달 전 아침 7시 쯤 출근 길이었다. 바로 우리 차 앞에서 빨간 신호등이 켜졌어. 그때 어디선가 개 한 마리가 달려나와 네 거리 한복판에 딱 버티고 서는거야. 한참만에 파란불이 켜져 막 움직이려는데 왼쪽에서 오토바이가 앞으로 나왔어. 그러자 이 개는 물론 다른 개 두세 마리가 바로 그 오토바이를 향해 무섭게 짖으며 달려드는 거야. 그러지않아도 개의 태도가 이상해서 유심히 보았거든. 왜 그랬을 것 같니?

앵그리버드 영화를 봤니? 너희들이 좋아했던 게임이잖아? 영화로 만들어졌나 봐. 얘들아. 화가 날 때가 있지? 화나면 너흰 어떻게 하니? 참는 것을 배워야 한다.

 

할아버지는 막내 손자가 어른이 되었을 때 무슨 일을 할지 궁금하지만, 그때까지 자신이 살아있을지 알 수 없어 그림을 그린다고 했다. 비록 할아버지가 곁에 없더라도 그의 그림을 통해 손주들이 사랑을 느낄 수 있도록 말이다. 때문에 할아버지는 손자와 함께 먹은 음식과 나눴던 대화, 함께 했던 장소에서 주로 영감을 얻는다고 한다. 그래서 그의 그림은, 평범한 일상을 그렸다할지라도 행복으로 반짝반짝 빛나는 느낌이다. 부디 앞으로도 할아버지의 행복한 그림을 계속해서 만날 수 있길 바란다.

프랑스 동물원에 경사가 있었다. 아기 기린이 태어났다.
엄마는 애기가 사랑스러운가 보다. "귀여운 내 새끼" 뽀뽀를 해준다.





이찬재
@drawings_for_my_grandchildren
http://grandpachan.com

김해인

읽는 사람이 즐거운,
언제나 유쾌한 글을 쓰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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