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소한 일상의 실천] 2. 저기, 사람이 있다.

14.10.13 1

크리에이티브 네트워크 <노트폴리오>에서는 세상에 존재하는 다양한 디자인 스튜디오의 작업 비하인드 스토리를 담은 <디자인 뒷간>을 기획했습니다. 앞으로 진행되는 <디자인 뒷간> 프로젝트를 통해 그간 궁금했던 스튜디오 작업 후기와 에피소드를 생생히 접해보세요. 담당 디자이너를 통해 보다 더 자세한, 보다 더 생생한 디자인 철학을 느껴보시길 바랍니다.

 

 

 

THERE ARE PEOPLE

유학을 결심하며 몇 가지 다짐을 했다. 그 중 하나가 ‘내가 나고 자란 한국에 대한 관심을 놓지 말자.’는 것이었다. 유학을 다녀온 이들의 작업(뿐만 아니라 그들의 삶)은 그들이 나고 자란 곳이 한국이란 것을 짐작하기 어려웠다. 그들의 유학 전과 후의 차이는 마치 TV 프로그램 <러브 하우스>같았다. 새집처럼 리모델링 된 집은 멋있었지만, 어딘가 낯설고 어색했다. 생경함은 단지 특정 학교와 지역을 연상시키는 작업 스타일 때문이 아니다. 그보다는 한국 사회에서 너무나 쉽게 마주하는 비상식적인 전근대성과 서구적으로 훈련된 세련됨의 차이에서 오는 것 같았다. 그들은 지금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현실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았고 그들의 작업은 미국 혹은 유럽의 어느 현대 미술관에서 마주칠 법한 예술 작품처럼 보였다. 나는 그 모던함을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촌스러웠지만, 한편으로는 그 촌스러움이 자연스럽다고 생각했다. 때문에 유학이라는 과정을 통해 ‘촌스러움’을 없애고 싶지 않았다. 그것 없이는 내가 나일 수 없다고 생각했다.

 

 학기가 시작되는 수업 첫 날, 교수는 나에게 “네가 평생에 걸쳐서 저항하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졌고, 나는 답하지 못했다. 나는 항상 내가 살고 싶은 삶의 방식, 지향하는 가치관들에 대해서만 생각했다. 불평과 불만은 개인적인 감정 차원에서만 머물렀으며 비판과 저항이라는 사회적 단계로는 나아가지 못했다. 영국에서의 삶은 그 질문에 답하기 위한 수많은 과정의 연속이었다. 나는 대화와 작업을 통해 다른 사람의 감정과 경험을 공유하기 위해 노력했다. 또한, 말로 전달되지 않는 가치를 읽고 해석하며 내가 만든 이미지를 통해 생각을 전달하는 법을 연습했다. 영국이라는 낯선 사회에서 한국 사회를 객관적으로 보기 위해 노력했고, 저항한 것들이 무엇인지 생각했다.  

 

      

 

용산참사 그리고 재개발 문제

2009년 겨울, 용산에서 6명이 죽었다. 그들은 일부 언론에서 보도하는 것처럼 전문 시위꾼이나 돈 몇 푼 더 달라고 쌩떼거리를 쓰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내가 대학 시절 자주 갔던 호프집의 이모님과 삼촌 같은 분들이었고, 그런 사람들이 불에 타서 죽었다. 참사가 일어난 지 몇 개월이 지난 후에야 그곳에 찾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그곳의 사람들은 여전히 국가와 거대한 건설 회사를 상대로 힘겨운 싸움 중이었다. 내가 도착하기 몇 시간 전, 마지막까지 버티던 세입자의 가게에 이유 모를 가스 폭발이 일어났다. 세입자는 가게를 비우고 도망갈 수밖에 없었다. 그 사이, 가게는 용역들에 의해 철거당했다. 일은 순식간에 일어났고 주변 사람들은 미처 손쓸 겨를조차 없었다. 경찰이 멀지 않은 곳에 있었지만 방관했다. 사람들은 경찰과 건설사(社) 용역을 구분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경찰과 용역이 하는 일이 크게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 2009년 용산, MK치킨이라는 작은 가게에서 이유모를 가스 폭발이 터졌다. 그곳에 계신 분들에 의하면 용산4구역에는 이런 이유를 알 수 없는 폭발들이 자주 일어났고, 그때마다 용역이 나타나 가게를 철거하곤 했다고 한다.

 

 

폭력적인 철거와 재개발은 많은 개발도상국에서 현재진행중인 이슈다. 중국에서는 2008년, 베이징 올림픽경기장을 짓기 위해 많은 지역을 재개발했고 그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강제 이주를 당했다. 나이지리아에서, 브라질에서, 그리고 많은 개발도상국에서 강제철거와 철거에 반대하는 세입자에 대한 폭력이 계속되고 있다. 용산에서 참사가 벌어진 후, 폭력적인 재개발이 사회적인 이슈가 되고 비판 받았지만, 유가족들에 대한 보상과 함께 논의 또한 사그라졌다.

중국이 지난 베이징 올림픽 준비기간 동안 벌인 강제철거는 1988년 김동원 감독이 제작한 다큐멘터리 <상계동 올림픽>을 떠올리게 한다. 20년 전 대한민국은 서울 올림픽을 준비한다는 명목 아래 상계동 일대를 재개발하기 시작했고, 지역주민은 갈 곳을 잃었다. 베이징 강제 철거는 그날의 우리네 모습을 떠올리기 충분했다. 하지만 20년 후, 용산에서 똑 같은 장면이 반복되고 있다. 한국사회는 20년이라는 시간을 역행하는 것 같다. 20년 전 그랬던 것처럼, 세입자들은 여전히 돈이 없고 폭력에 저항할 힘도, 갈 곳도 없다. 그리고 경찰과 국가는 여전히 그들의 편이 아니었다.

 

 

 

저기 사람이 있다

어느 날, 사진작가 노순택의 용산 참사 유족들에 대한 사진을 봤다. 사진 속 사람들은 비통한 표정으로 영정 사진을 들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들고 있는 사진은 모두 제대로 된 영정 사진이 아니었다. 게다가 그들 중 한 명(그가 한대성 씨의 부인 신숙자 씨라는 것은 나중에 알았다)은 자신의 남편 사진조차 준비하지 못했다. 궁금했다. 아무리 급했어도 남편 장례식에 준비할 사진 한 장조차 없었을까.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마침 용산참사대책위원회에서 제작한 책자와 인터뷰를 통해 그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 남일당 디자인 올림픽 (Namildang Design Olympic) 노순택, 용산, 2009

 

“죽으려고 거길 누가 올라가겠어요. 다 살려고 가는 거 아  니에요. 일 년 동안 장례를 치르지 못해 병원비가 3억 이 넘어요. 하지만 병원비를 생각할 겨를이 없어요. 이제 물러날 곳이 없어요. 이 일이 잘 해결된다고 해도 다시 살아갈 희망이 보이지 않아요. 그렇지만 남편이 너무 억울하게 죽었어요. 이렇게 포기할 수는 없어요.”

— 한대성의 아내 신숙자

 

“1월 29일에 아버지와 빙어 낚시를 가기로 했었다. 친구들도 같이 가기로 약속했었는데…… 나와 동생은 학교에서 학비를 지원받는 상황이었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아버지는 내 또래 깡패들에게 얼굴을 얻어맞은 날 혼자 술을 드셨다. 아버지가 용역들에게 맞고 있을 때 경찰은 신고를 받고도 멀리서 지켜보기만 했다. 그 해 겨울, 살던 집이 갑자기 없어졌다. 기르던 강아지도 없어졌고 모든 것이 사라졌다. 아버지는 돌아가시기 전날, 5일 정도 못 들어온다고 하셨다. 밥 잘 챙겨 먹고 어머니를 잘 돌보라고 하셨다. 그게 마지막이 될 줄 몰랐다. 많이 야윈 어머니를 보는 것이 너무 힘들다. 8살짜리 동생이 무너져 버릴까 봐 무섭다.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 못하고 보낸 것이 너무 죄송해서, 너무나 억울해서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다.”

— 윤용현의 아들 윤현구

 

“돈 없이 사는 것이 죄다. 고생시켜서 미안하다. 꼭 올라가서 성공하고 돌아오겠다. 그렇게 눈물을 흘리면서 올라갔다. 마지막으로 된장국을 해서 먹였다. 바빠서 못 먹는다는 걸 억지로 먹였다. 그래도 밥을 먹으니까 속이 풀려서 기분이 좋다고 했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그걸 먹여서 보냈으니 다행이지, 안 먹였으면 얼마나 후회가 됐을까.”

— 양희성의 부인 김영덕

 

“용역 깡패들이 시아버지의 급소를 때렸다. 백주 대낮에 30대 남자가 70대 노인을 때리고 끌고 갔다. 사진을 찍으려고 하니까 다가와서 카메라를 부숴 버렸다. 경찰을 불러도 오지 않았다. 사람들은 다 도망가 버렸고, 깡패 한 명이 대걸레자루를 끼운 갈고리를 들고 나타나 가게 간판을 다 부숴 버렸다. 시아버지가 깡패들을 고소하자 그 깡패가 맞고소했다. 경찰은 우리를 잡으러 왔다. 시아버지는 한 자리에서 30년 동안 장사를 하셨다. 이사도 한 번 안 가셨다. 가게는 작고 우리는 넉넉하지 않았지만 살만했다. 재개발이 시작되기 전만 해도 아버지가 불 속에서 타 죽고, 막냇동생이 무릎 뼈가 다 으스러진 채 감옥에 갇히게 될 줄 정말 몰랐다. 우리는 그냥 평범하게 사는 사람들이었다. 아버지와 남편이 데모하러 옥상에 올라가자 신고해도 오지 않던 경찰 수천 명이 몰려왔다. 아버지와 남편이 엄청나게 맞을 거라는 생각에 어쩔 줄을 몰랐다. 기도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때도 죽을 줄은 몰랐다. 살려고 데모한 거지 죽으려고 데모한 게 아니다. 이젠 뭐가 진실인지 뭐가 현실인지 도저히 모르겠다. 대통령도 장로고 조합장도 교회 장로다. 그들이 도대체 무슨 기도를 할까 너무 궁금하다.”

— 이상림의 며느리 정영신

 

“우리 가족에게 겨울은 항상 추웠습니다. 하지만 좁은 냉동실 안에 계시는 아버지를 생각하면 그때마저 그립습니다. 이제 겨울도 다시 오는데, 아직까지 연락이 없는 걸 보면 아빠가 진짜 죽긴 죽었나 보다 싶어요. ‘상현아 아버지는 평생을 정직하게 살려고 애썼다. 정직한 게 죄라면 우리가 지금 벌을 받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엄마 잘 보살펴 드려라. 며칠 걸리지 않을 거야.’ 난 어떻게 대답했어야 했는지 아직도 모르겠습니다. 아빠와 엄마와 나는 단지 바람을 막아 주는 벽이 있는 곳에서 살고 싶었을 뿐입니다.”

— 이성수의 아들 이상현

 

이야기를 보고 들으며 많이 놀랐다. 이야기 자체의 끔찍함에 놀랐고, 민주화를 이룬지 20년이 되어 간다는 나라가 사회의 구성원을 대하는 태도에 놀랐다. 나는 그들의 이야기가 어떤 자료보다도 사회의 단면을 생생하게 보여 준다고 생각했다. 사람들은 단지 자신이 겪은 일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지만, 이야기는 단순히 한국의 용산이라는 지역에서 일어난 재개발 참사가 아니었다. 이야기는 우리가 주변에서 쉽게 마주하는 평범한 사람들의 절박함이었다,

 

 

 

음악 그리고 텍스트

용산참사와 유가족의 이야기를 선동적이지 않되 감정적으로 공감할 수 있는 방식으로 전달하고 싶었다. 이 촌스러운 나라의 모더니스트들은 작은 감정적 표현에도 진절머리를 내는 것 같다. 아마도 그들의 모던함이 ‘수입’된 것이기에, 한국 사람들의 질박한 감정조차도 서양인의 시각으로 바라보는 듯하다. 그 결여된 자의식을 극복하고 싶었다.

 

글자는 생각을 정리하고 소리는 생각을 퍼트린다. 이렇듯 다른 두 가지 요소의 전달 방식을 작업에서 시도해 보고 싶었다. 희생자들의 말은 이성적으로 정리되어 있지 않았지만, 그들의 말 속에서 감정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었다. ‘말’은 직설적이고 감정적이었지만, 내 얄팍한 이성을 통해 재단하고 싶지 않았다. 정리되지 않은 감정을 있는 그대로 전달하고 싶었다. 하지만 ‘말’이 글자로써 지면 위에 옮겨지면, 절박한 심정은 반감되는 듯했다. 나는 ‘소리’가 그 부족함을 채워 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 Lee sang lim

 

- Yang hee sung

 

 

음악과 소리의 중간

그들의 ‘말’을 소리로 만들기 위해 길드홀 음악연극학교Guildhall School of Music and Drama에서 작곡을 공부하는 일본 학생 에이코Eiko Azuma와 함께 작업했다. 나는 그녀에게 조사한 모든 자료와 사진을 넘겨주었고, 오랜 시간 동안 이야기를 나눴다. 그녀는 한국에서 아직도 이런 일이 일어난다는 사실에 굉장히 놀랐다. 동시에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며 열정적으로 작업에 동참했다.

 

- 일본인 뮤지션 에이코와의 협업, 재개발 과정에서 발생하는 국가와 건설사의 폭력적인 진압은 단순히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일본인인 에이코도 문제의 심각성에 대해 공감했고, 작업에 열정적으로 참여해주었다.

 

우리는 그들의 말이 반영될 형태가 음악과 소리의 중간이어야 한다는 데 동의했다. 감정은 때론 말 속에서 명확한 형태를 드러내지만 대부분 명확하지 않다. 불안, 긴장, 공포, 허탈감의 감정과 그 일이 일어나기 전의 추억, 그리움, 슬픔이 한데 뒤섞여 있었다. 우리는 복합적인 감정을 전달하는 음악과 소리의 중간을 만들기 위해 오랜 시간 대화하고 작업했다.

 

 

어떻게 전달할 것인가

어느 날 책상 위에 놓여 있는 작은 오르골을 발견했다. (지금도 그 오르골이 어디에서 왔는지 모르겠다.) 무심코 돌려 본 작은 상자에서 애절하고도 슬픈, 그러나 맑은 소리가 흘러나왔다. 소리는 어린 시절 어머니가 연주해 주던 이름 모를 악기를 떠올리게 했다. 나는 그 작은 악기가 어떤 방식으로 움직이는지 궁금했고 구조를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오르골의 가운데에는 작은 원통이 있고 표면의 오돌토돌한 돌기가 쇠로 만들어진 건반과 부딪히며 소리를 냈다. 돌기들은 점자 같았고, 마치 오르골이 만들어 내는 음악의 악보(실제로 그 돌기들은 악보의 기능을 하고 있었다)이자 가사인 것처럼 느껴졌다. 오르골이 연주될 때, 같은 악보에 의해 만들어진 음악이라도 연주하는 사람의 감정에 따라 소리가 바뀌는 점이 좋았다.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결국 용산에서 숨진 ‘사람들’의 이야기다. 때문에 만들어진 음악과 소리를 관람자의 참여 없이 일방적으로 전달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연주하는 사람에 따라 속도와 강약을 조절하며 다른 소리를 만드는 오르골이 작업에 적합한 도구라고 생각했다. 인터넷을 통해 종이 악보를 사용하는 오르골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펀치처럼 종이에 구멍을 뚫을 수 있고, 구멍은 기존 오르골의 돌기 역할을 했다.

- 뮤직박스 (music box), 직접 작곡한 음악을 연주할 수 있는 오르골 뮤직박스로 그랜드 일루션스 (Grand Illusions)의 홈페이지 (www.grand-illusions.com)에서 구입할 수 있다.

 

 나는 ‘용산 사람들'의 증언을 악보의 레이아웃을 따라 배치했다. 오르골을 통해 연주될 음악은 ‘그들’의 이야기를 기반으로 작곡했고, 개인적으로 음악이 ‘그들’의 목소리로써 사람들에게 전달되길 바랐다.

 

 

소리의 질감, 글자의 질감

레터프레스Letter Press를 사용해서 악보 위에 글자를 찍기로 했다. 레터프레스는 글자를 종이 위에 단순히 올려 놓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꾹’ 하고 눌러야 한다. 종이 위에 찍힌 글자는 손으로 질감을 느낄 수 있는데, 우둘투둘한 느낌이 오르골의 돌기들과 비슷한 질감을 만든다. 나는 잉크를 글자 위에 한 번만 바른 후 여러 번 찍었다. 처음에는 선명했던 글자가 점점 흐려졌고, 그에 따라 소리 역시 불완전해지도록 했다. 검은색 글자와 함께 연주될 소리는 우리가 작곡한 그대로였지만, 종이 위의 글자의 색이 옅어질수록 악보의 구멍 개수 또한 줄어들도록 했다. 짙고 선명한 소리와 글자는 옅고 불분명한 형태까지 순환 · 반복된다. 나는 이 과정을 통해 사람들이 얼마나 쉽게 우리 주변의 일들을 잊어버리는지 알려 주고 싶었다. 2009년 겨울 용산에서 목숨을 잃은 6명의 희생자와 폭력적인 재개발은 우리 사회에서 가장 큰 이슈였지만 몇 년의 시간이 흐른 지금, 사람들은 용산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잊어버린 듯하다. 하지만 우리가 사회의 어두운 면을 잊은 채 살아간다면, 그것은 어느 순간 다시 반복될지도 모른다. 20년 전 아무도 2009년의 서울에서 이 같은 일이 다시 반복될 거라 예상하지 못했던 것처럼.

 

- 완성된 악보, 희생자들의 이야기를 전달하는 음악 다섯 곡이 만들어졌다.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일들

용산을 포함한 대부분의 재개발은 국가의 장기적인 계획과 거대 건설 회사의 이익에 따라 진행된다. 개인의 힘으로 감당하기에 계획은 너무나 거대하고 폭력적이다. 그들은 세입자들에게 나지막이 “나가 달라”고 부탁하지 않는다. 이렇듯 사람의 힘으로 감당할 수 없는 거대한 폭력의 질감을 눈으로 보여 주고 싶었다. 오르골을 통해 표현하려고 했던 희생자들의 울림은 폭력의 질감을 표현하기에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나는 거대한 느낌을 있는 그대로 보여 주고 싶었다. 그래서 악보를 수백 배 확대하고 그 위에 그들의 목소리를 악보와 같은 레이아웃으로 따라 그려 나갔다.

- 레터프레스로 제작된 낱장의 악보들, 낱장의 악보를 하나의 긴 악보로 연결한 후 오르골을 통해 순환되면서 반복적으로 연주되도록 했다.

 

 

 왜 지금 한국의 용산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 하나

지도교수 중 한 명이 이런 질문을 한 적이 있다. “너는 왜 과거의 일에 관심을 갖나?” 한국은 개발도상국이 아니지만 선진국 또한 아니다. (선진국 편입여부를 나라의 경제 규모로만 따지는 것이 아니라면 한국은 사실상 여전히 개발도상국보다도 못한 전근대적인 국가일지도 모른다.) 수십 년 전 선진국이라 불리는 국가에서 과거에 일어났던 일들이 지금 대한민국에서 벌어지고 있고, 반대로 이 나라에서 일어난 일들은 수십 년 후 지금의 개발도상국에서 반복될지도 모른다. 오랜 시간 동안 순환은 반복돼 왔다.

 

나는 이 작업이 일종의 사례 연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작업을 통해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재개발에 따른 인권 침해’를 이야기하기 보다 조금 더 직접적이고 ‘날 것’ 그대로의 감정과 정보를 재해석해 전달하고 싶었다. 더불어 작업을 통해 더 많은 사람들과 지구의 반대편에서 일어난 사건에 대한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싶었다. 방식은 사람들에게 내가(혹은 이 사회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을 전달하는 데 효과적일 것이라 생각했다. 그 연구의 대상이 내가 나고 자란 곳, 내가 가장 잘 알고 있는 대한민국인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 약 6m 길이의 대형 종이 위에 작업을 하기로 했다. 이 자체가 사람들을 압도했던 건물을 연상시키기를 바랐다.

 

 

- 단어 한 개를 완성하는 데 몇 가지의 단계가 필요했다. 그들은 불에 타서 비참하게 목숨을 잃었고, 나는 목탄을 사용해서 그 죽음의 질감을 보여주고 싶었다. 글자를 그려 나가는 과정에는 굉장히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나는 이 작업을 쉽게 하고 싶지 않았다. 내 몸과 손가락을 사용해서 노동을 통해 작업해나가는 것이 이 작업의 주제와 어울리는 방식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이 작업을 진행할 때 아이티에서는 엄청난 지진으로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하지만 나는 정작 주변 사람들의 현실은 모른 척하면서 누구나 공감(혹은 동정)할 수 있는 가치중립적인 이야기로 관심을 얻고 싶지는 않았다. 그런 태도는 마치 용산에서 갈 곳을 잃은 사람들에 대해 침묵하면서 아이티에는 엄청난 구호 헌금을 보내는 한국 대형 교회의 태도와 다를 바 없다고 생각했다.

 

 

예술 혹은 디자인

누군가의 의뢰를 받고 진행하지는 않았지만 이 작업이 예술 작품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때문에 클라이언트라 불리는 사람들에게 돈을 받지는 않았지만, 어떤 필요성을 느껴 작업을 계획하고 진행했다. 필요성은 ‘소비’와 연관되지 않았지만, 더 많은 사람들과의 소통을 목적으로 한다는 점에서 소위 예술 작품이라 불리는 것들과는 성격이 다르다고 생각했다.

 

 

대학시절, 교수들에게 가장 많이 들었던 말 중의 하나는 “너 예술 하냐?”라는 핀잔 섞인 조롱이었다. 아마도 그들의 말 속엔, 돈과 관계없이 젊음을 허비하는 것처럼 보이는 예술가들에 대한 비하와 자신들이 규정해 놓은 ‘디자인’개념을 벗어나는 시각 작업물에 대한 거부반응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어떤 작업’이 소수의 교육받은 사람들과 예술가들을 위한 ‘개념 놀이’가 아닌, 많은 사람들과 보편적 가치를 나눌 수 있는 ‘소통의 창구’가 될 수 있다면 비록 경제적인 가치가 없다고 하더라도 예술인가 아닌가 하는 문제는 중요하지 않다. 더욱이 그 작업이 사회를 반영하고, 구성원들로 하여금 자신이 속한 세계를 한 번 더 돌아볼 기회를 제공한다면 더더욱 그렇다. 세상의 모든 가치가 돈으로 계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듯 ‘디자인’이라고 불리기 위한 필요조건에는 돈 이외의 많은 것들이 존재한다.

 

 

묻고 대답하기

오늘날 선진국 국가들의 문화적 풍성함과 경제적 풍요의 대부분은 그들이 식민지 삼았던 국가들의 피눈물 위에 이뤄졌다. 선진국에서 태어나 더 많이 누리고 더 많이 배울 수 있었던 사람들은 그들이 누린 만큼 책임 의식을 가져야 한다. 이런 책임 의식은 단순히 국가 단위로만 나줘 생각할 수는 없다. 같은 나라에 태어나 평생을 자랐어도, 재벌 아버지를 둔 사람과 노동자의 아들이 체감하는 사회는 현저히 다르다. 재벌이 누리는 모든 경제적 풍요가 회사를 위해 일하는 노동자의 노동에 기반한다고 할 때, 재벌이 가져야 할 사회적 책임은 상대적으로 더 클 수밖에 없다. 선진국에 살고있는 지식인들이 자기 자식만 걱정하는 것이 이기적인 사고방식이라 비난받는 것처럼, 한국에서 태어나 비싼돈을 써가며 영국에서 공부하는 사람이 자신의 개인적인 관심사만 다루는 것 역시이기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작업을 진행하며 지도교수와 가장 많은 시간 동안 이야기를 나눴던 부분 역시 이러한 문제의식에 관한 것들이었다. 그는 끊임없이 나에게 질문을 던졌다. 이 작업이 나 자신만을 위한 것은 아닌지, 작업에 등장하는 사람들이 단순히 작업의 소재로 쓰이는 것은 아닌지, 나는 도대체 누구와 이 작업을 통해 소통하고 싶은 것인지, 내가 하려고 하는 작업 방식이 과연 주제를 전달하는 데 가장 효과적인 것인지.

수많은 질문에 답을 내리는 일은 여전히 어렵다. 그것은 아마도 삶을 살아가는 나의 태도를 되돌아보며 지금까지 해온, 그리고 앞으로 해나갈 작업들을 통해서 겨우 답할 수 있을 것이다.

 

 

권준호

그래픽디자이너. 영국 왕립예술대학교(RCA)에서 커뮤니케이션 아트&디자인을 전공하고, 같은 곳에서 일 년간 RDP(Research Design Publishing)과목을 강의했다. 조나단 반브룩 스튜디오와 와이 낫 어소시에이츠에서 그래픽디자이너로 일했으며, 현재 김어진, 김경철과 함께 디자인 스튜디오 ‘일상의실천’을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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