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umn 빈 방

빈 방

18.04.16 3주 전, 생애 절반 이상을 함께한 반려견이 죽었다. 내 짧은 인생 동안 함께 한 날이 함께 하지 않은 날보다 많았기에 상실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처음에는 죽음이 믿기지 않았고, 그만큼 아무렇지 않았다. 하지만 이내 죽음을 실감하기 시작했을 때 ‘오늘 하루를 어떻게 버티지’하는 두려움이 앞섰다. 친구였던 가족이 죽었지만 세상은 어제와 별반 다를 게 없었고, 어김없이 출근을 해야만 했다.  "엄마가 해준 음식이 제일 맛있어요." 4반 정휘범   "약속은 꼭 지켜야 한다고 생각해. 우리 약속 꼭 지킬게." 3반 박예슬   죽음을 받아들이는 일이 더 힘들었던 건, 일상생활에서 시시때로 ‘죽음’을 깨닫는 순간이 많았기 때문이다. 아침에 일어나 계단 아래 햇빛을 받고 있던 모습이, 출퇴근 때마다 우리끼리 하던 인사가, 나를 바라보던 따듯한 눈빛이, 더이상 없었다. 세상사 모든 만물이 ‘언젠가 죽는다&rs 0 Read more
Column Me too, and with you

Me too, and with you

18.03.09   성폭력 피해자 '민영이'로 살았던 9년을 그려낸 서도이 작가의 전시제목    어렸을 적, 엄마는 종종 나를 불러다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하곤 했다. ‘자리에 앉을 땐 다리를 꼭 오므려라’, ‘누군가 너의 다리와 소중한 곳을 만지면 꼭 얘기해라’, ‘남성은 조심해라’라는 것이었다. 이런 훈육은 ‘낯선 남성’뿐만 아니라 가까운 일가친척과 지인에게도 해당하는 이야기였기에 어린 나에게는 그 훈육이 참 이상하고도 ‘엄마는 예민한 사람’이라는 인상을 심어주었다. <죽은 민영이의 장례식>은 서도이 작가의 첫 개인전 제목이다. 작가는 성폭력 피해자로서 이번 전시회를 준비하며 서민영에서 서도이로 개명을 했다. 자신만의 특별한 방법으로 '미투'에 동참한 것이다. 언젠가는 그 교육의 연유가 궁금해져 엄마에게 물으니 “성(性)문제는 가장 가까운 0 Read more
Column 미술, 어떻게 읽을 것인가 -1

미술, 어떻게 읽을 것인가 -1

18.02.02 한 세기 이전의 작품을 연구하는 미술사 연구자로서 현재를 살며 몇 백 년 전의 작품을 발굴하고 연구하는 일에 종종 한계를 느낀다. 특히, 한국인으로서 ‘동양인’의 시선으로 미술의 원로인 서양화가를 공부하고 있다는 사실은 현재 살고 있는 장소와 시간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일하는 실무 공간은 죽은 작가들의 회고전을 되새기는 장소가 아닌, 동시대 작가들의 작품을 관리하고 판매하는 갤러리다. 이렇듯 예술이라는 큰 울타리에는 수많은 구분들이 내재해 있다. 때문에 막연하게 다가오는 '미술'이라는 단어는 시대와 공간의 구분을 모호하게 포섭하며 하나의 목표를 지향하는 고귀한 영역으로 인식되기도 한다.   현대예술 다이어그램, 알프레드 바, 1936, 출처: https://andreasartblog.wordpress.com   역사적 의의에 따라 임의적으로 시대를 구분하는 미술사조들, 또 그 안에서 나뉘는 서양과 1 Read more
Column [미술 말하기] 기억의 조합, 이송희 작가 십사

[미술 말하기] 기억의 조합, 이송희 작가

17.12.14 앞으로 노트폴리오 매거진에 게재할 <미술 말하기>는 필명 ‘십사’로 활동하고 있는 박주원의 평론글입니다. 평론을 통해 미술사학적 관점에서 살펴보는 다양한 작품 속 이야기와 그녀만의 해석을 만나보세요. 글의 원본은 ‘대안공간 눈’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기억의 조합   도판 1. <Untitle>, 2016, acrylic and marker on canvas, 112.1 x 162.2 cm 우리의 일상은 기억의 조각이다. 누구의 이야기로 만들어져 있는지 모르지만 우리의 일상은 모두 누군가와의 이야기나 어떤 사람과의 추억, 그리고 기억과도 같은 생각들의 끈으로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속에 들어가서 남의 이야기를 들어볼 수 없으니 우리는 우리들이 기억하고 생각하고 있는 것만을 가지고 이야기를 조합해낸다. 마치 머릿속에 날짜 별 폴더 혹은 기분 별 폴더를 만들어 그 안에 차곡차곡 매 0 Read more
Column 노동과 결합한 예술, 길종상가 십사

노동과 결합한 예술, 길종상가

17.11.20 일요일을 마무리 하면서 웹툰을 보곤 한다. 중학교 때부터 만화에 빠져 살았던 내게 웹툰은 일상을 잠깐 잊게 하는 즐거운 취미이다. (물론 잠깐 보지 않는다는 것이 함정이지만) 어쨌거나 웹툰을 보면서 10대의 감성도 느끼고 가끔은 병맛을 느끼기도 하면서 즐거움을 얻는데, 최근에 굉장히 신선한 웹툰을 발견했다. 바로 <오늘도 핸드메이드!>라는 소영 작가의 웹툰이다. <오늘도 핸드메이드>, 출처: 네이버 웹툰   이 웹툰은 작가가 직접 만든 핸드메이드 소품을 보여준다. 웹툰의 내용은 서두에 소품을 만들게 된 이유와 감정을 제시하고, 이후 소품을 만드는 과정과 결과물을 보여주는 방식이다. 작가는 강아지 인형과 양말, 베갯잇, 담요 등, 일상의 소품을 만드는 과정을 보여주는데, 이렇게 물건을 선정하고 만드는 과정이 인위적이지 않은 느낌을 준다. 작가의 생각을 따라서 웹툰을 읽다 보면 어느새 마지막 장면에서 작가가 만든 작품을 사진으로 접하게 되는데, 이를 통해 0 Read more
Column 포스터의 힘, 민중공방(l’Atelier populaire) 십사

포스터의 힘, 민중공방(l’Atelier populaire)

17.09.26 우리는 힘(le pouvoir)이다   선거철이 되면 나라 곳곳에 포스터가 붙는다. 어떤 정당의 어떤 후보가 출마했는지 설명하는, 국민들의 ‘알 권리’를 충족하기 위한 포스터가 붙는 것이다. 지난 5월에 치러진 대선에서는 안철수 후보의 포스터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곤 했다. 물론, 대선에서는 좋지 않은 성적을 냈지만 포스터 입소문만으로 어느 정도의 홍보 효과를 얻었다. 그러나 정작 그가 하고자 하는 말이 무엇인지, 그 내용에 대해서는 쉽사리 알 수가 없다. 안철수의 브랜드 가치만을 내놓기에는 포스터가 포함하는 내용이 극히 적기 때문이다. 우리 기억 속의 포스터란 아마도 ‘화재 조심’이라는 문구를 어떻게, 그리고 강렬하게 한 장의 종이 안에 넣을 것인지를 고민하던 때부터 시작할 것이다. 초등학생 때 느꼈던, 하얀 백지 위에 ‘화재 조심’이라는 표어를 어떻게 넣을 것인지를 고민하던 것이 생생하다. 종이는 작았고 0 Read more
Column ‘취향’의 발전

‘취향’의 발전

17.08.24 한 선배기자가 재미 있는 사람의 블로그를 발견했다며 직접 url을 입력해가며 보여줬던 일이나 ‘요즘 관심이 생긴 부부가 있어’라며 부부의 일상을 이야기하던 친구의 모습에 놀란 적이 있다. 처음엔 단순히 타인에게 관심이 많은 ‘개인의 성향’쯤으로 여겼지만, 사실 이러한 현상은 낯설지가 않다. 지인과의 만남에서 SNS로 맛집을 검색하거나, 내가 원하는 삶을 살고 있는 듯한 인물의 일상을 쉽게 탐하는 일이 흔하디 흔해서다. 이러한 현상에는 매체 발달이라는 사회적 배경과 관음의 심리가 작용한다. 그러나 조금 더 파고들면, 우리는 ‘취향’을 발견할 수 있다. 지금 당장 자신이 팔로우하고 있는 인물을 공통된 범주로 묶어봐도 뭔가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뭔가’를 우리는 ‘취향’이라 부른다.    2017 Gucci S/S에는 꽃과 동물이 등장했다 0 Read more
Column [미술 말하기] 인생의 허망함을 이겨내는 관계에 대하여 십사

[미술 말하기] 인생의 허망함을 이겨내는 관계에 대하여

17.08.08 앞으로 노트폴리오 매거진에 게재할 <미술 말하기>는 필명 ‘십사’로 활동하고 있는 박주원의 평론글입니다. 평론을 통해 미술사학적 관점에서 살펴보는 다양한 작품 속 이야기와 그녀만의 해석을 만나보세요. 글의 원본은 ‘대안공간 눈’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인생의 허망함을 이겨내는 관계에 대하여   <Vanitas Vanitatum(바니타스 바니타툼)> 우무길   찬란한 것들은 모두 순간에만 존재한다. 순간이 지나면 시간이 지녔던 빛은 모두 무채색의 빛으로 바래 버린다. 지금 이 순간에 생기는 오해와 인생에 대한 회한, 그리고 다양한 존재에게 내뿜고 싶어지는 미움과 허망함과 화는 조금만 지나면 없어지기 마련이다. 시간은 그만큼의 힘을 지니고 있다. 좋은 것도 나쁜 것도 모든 것이 조금씩 희미해지기 때문이다. 삶도 마찬가지다. 지금의 찬란함은 조금 있으면 모두 꺼져버릴 불씨이다. 우리 인생의 불꽃놀 0 Read more
Column 우정이라는 이름, 오인환 십사

우정이라는 이름, 오인환

17.07.14 <우정의 물건(Things of friendship)> 오인환, 2000-2008 새로운 사람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상대방과의 공통점과 차이점, 좋은 점과 싫은 점을 찾으며 관계를 이어나갈 것인지 아닌지를 판단하게 된다. 그렇게 여러 번의 만남을 통해 공통점이 많고, 좋은 점이 많이 보이는 사람을 옆에 두고자 (서로 혹은 혼자) 노력하는 게 관계를 맺는 과정이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의 농도가 짙어진 단계를 우리는 ‘우정' 혹은 '사랑'이라고 명명하곤 한다. 사전에 게재된 정의를 보면, 우정은 ‘친구 사이의 정’이다. 그렇다면 친구는 무엇일까? 친구(親舊)는 ‘가깝게 오래 사귄 사람’을 말한다. ‘정(情)’은 마음의 작용이라고 하니, 결국 우정은 ‘가깝게 오래 사귄 사람 간에 일어나는 마음의 작용’이라고 볼 수 있다.   <우정의 물건(Thin 0 Read more
Column 사랑을 말하는 그림들

사랑을 말하는 그림들

17.07.06 예술작품을 감상할 때면 작가 개인이 겪은 일화나 그로 인한 정서가 고스란히 전해지지 않을 때가 있다. 작품은 행복을 이야기하는데 나는 행복하지 않을 때, 작품 속 인물은 비극의 절정을 맞이하는데 나는 삶이 즐거울 때가 그렇다. 특히 보편적인 정서가 아닌 특수한 상황에서의 감정을 다룰 때면 더욱 공감하기가 어렵다. 그럴 때면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감정에 쉽사리 공감할 수 없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작품으로부터 멀어져 완전히 타자의 입장이 될 때면 너와 나, 아니 작가와 관람자 사이에 균열이 생기는 것을 느낀다.   <In Bed the Kiss> 툴르즈 로트렉(Henri de Toulouse-Lautrec), 1982   하지만, 보편적인 감정을 소재로 다룬 작품을 보면 왠지 모르게 친근한 마음이 들어 더 깊이 관찰하고 다가가게 된다. 이는 작품의 예술성과 관람자의 지적 수준과는 별개의 문제다. 우리가 흔히 겪고, 그래서 공감할 수 있는 감정 중 0 Read mo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