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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누로 대리석을 번역하는, 작가 신미경

17.06.30 0

<트랜스레이션 시리즈> 신미경, 비누, 가변크기, 2006-2013

 

인간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이 사용하는 언어를 번역하고 해석하는 일이다. 즉,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이해하고 해석하는 과정이 가장 중요하다. ‘해석’이라는 것은 ‘사물이나 행위 따위의 내용을 판단하고 이해하는 일, 혹은 그 내용’인데, 여기서 ‘내용을 판단하고 이해하는 일’의 기준이 굉장히 주관적이므로 관계는 오해를 수반할 수밖에 없다. 때문에 첫만남 이후, 사람과 사람이 가까워지고 친해지는 것은 그만큼 오해를 얼마나 잘 풀어내는가의 정도에 따라 달라진다.

그러나 사람과 사람 사이의 오해가 완전히 풀린다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다. 사람은 자신이 속한 공간과 시간에 의해 항상 변하기 때문이다. 서로의 언어를 이해하며 최대한 오해를 푸는 쪽으로 번역을 했지만, 그럼에도 오해가 생기는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다. 그러나 오해가 생기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를 찾아보면, 그것은 바로 이기심을 갖고 스스로의 관점에 대한 회의를 갖지 않기 때문이다.

 

<트랜스레이션-비너스 프로젝트> 신미경, 출처: http://blog.naver.com/kwwoolim

 

<트랜스레이션-화장실프로젝트> 신미경, 출처: 복음기도신문

 

오해는 자신이 보고자 하는 대로 상대방을 보는 데서 시작된다. 앞서 말했듯, ‘내용을 판단하고 이해하는 기준’이 지금까지 내가 가지고 있던 기준으로 하기 때문이다. 그 기준은 자신의 인생과 환경, 주위 사람들과 연결되기에 스스로에게는 더없이 객관적인 지표가 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기준은 감정적이고 주관적이다. 자신이 객관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더 많은 오해를 품고 살아가는 것은 그들의 기준이 정말로 주관적이기 때문이다. 주관적인 기준에 맞춰 세상의 모든 것을 객관적으로 (이미) 느끼고 있다고 생각하면, 오차 범위가 눈에 들어올 리 없다. 그러므로 다양한 무엇, 혹은 인간과 관계를 맺을 때 가장 중요한 점은 자신의 이기심을 버리고 상대방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내가 지금 생각하고 있는 것이 맞지 않을 수도 있다는 점을 인지하는 것이다. 그래야만 우리는 상대방의 언어를 ‘번역’하고 ‘해석’할 수 있다.

 

<트랜스레이션-비너스 프로젝트> 신미경, 2009, 출처: 아트허브
화장실에 설치된 비누 조각상은 관람객이 손을 씻을때 사용함으로써 마모된다.

 

비누를 재료로 작업을 하는 신미경 작가의 작품을 보면서 나는 작가의 번역을 대하는 자세를 생각해보았다. ‘트랜스레이션(Translation)’은 작가가 개인전에 사용한 전시 제목이기도 하다. 작가는 서양의 대리석 작품을 비누로 제작한다. 그리고 외형만 서양의 조각상과 꼭 닮은 작품을 박물관 안에 존재하는 그리스 시대의 유물처럼 전시를 한다.



 

<트랜스레이션-비너스 프로젝트> 신미경, 비누, 1998 제작, 2009 복원

작가가 시각 예술을 통해 문화적 번역의 문제에 눈을 돌리게 된 것은 1997년 말, 런던 대학 슬레이드 스쿨(Slade School)에서 작업을 시작하면서부터다. 우연한 기회에 한 복원가가 이탈리아 조각가 에밀리오 산타렐(Emilio Santarell)이 대리석으로 제작한 신고전주의 양식의 <목욕하는 비너스>를 공들여 세척하는 과정을 보게 된다. 이때 오랜 세월의 더께가 벗겨지며 마모된 흔적이 드러나는 모습을 통해 작가는 견고한 돌을 마모시키는 시간의 감각을 느낀다. 그리고 더 나아가 조각상이 애초의 목적과 용도는 잊혀진 채 시공을 이탈하여 작가와 마주하게 된 상황에 주목하게 된다.

작가는 이렇게 하나의 사물이 원래 놓여있던 시간과 공간을 벗어나 탈문맥화 하는 과정을 ‘유물화’라고 지칭하고, 스스로 그 과정을 재연한다. 단, 견고한 대리석과는 완전히 상반된 성질의 무르고 부드러운 비누를 재료로 덩어리는 붙이고 디테일은 깎아내는 방법을 병행하며 원본의 마모된 흔적까지 완벽하게 복제한다. 원작이 전시된 공간을 벗어날 수 없기 때문에 작품 바로 옆에서 ‘공개 작업’을 하게 되고, 이는 자연스럽게 퍼포먼스로 인식되었다. 복제품이 완성되기까지 걸린 시간은 6개월, 원본이 100년 이상의 긴 세월 동안 겪은 유물화 과정을 반년으로 압축한 것이다. 출처: 신미경의 <트랜스레이션>에 관하여

 

<화장실 프로젝트-불상> 신미경, 비누, 가변크기, 2004-2013

 

<고스트 시리즈-레드> 신미경, 비누, 가변크기, 2007-2013


신미경 작가는 서양 사람들이 대리석 조각상에 부여한 다양한 의미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해석한다. 아주 오래 전, 사람들은 깔끔하게 만들어진 대리석 조각상에 자신만의 언어와 표현으로 평가를 내렸을 것이다. 그리고 당시 조각상에 남겨진 다양한 언어들은 그 조각상을 눈부시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조각상은 홀로 빛나지 않고 유럽의 역사와 맥을 같이 했다. 유럽이 점점 눈부신 나라가 되었으니 조각상 또한 점점 눈부셔진 것이다. 이런 과정에서 조각상은 본인이 원했든 원치 않든 성스러운 이미지를 얻었다. 그렇게 조각상은 학교나 미술관 등의 실내 장소에서 빛을 발하고 있었고, 사람들은 지속적으로 평가를 내렸다. 그리고 어느새 다양한 해석들이 모여 조각상은 마치 원래부터 자신이 그런 평가를 받았던 것처럼 더 빛을 발하고자 했다. 자연스레 이런 과정이 몇 백 년, 몇 천 년까지 이어지면서 조각상은 아우라를 지닌 대상으로 변모했다.


그러므로 ‘대리석 조각상’은 단순히 하나의 조각상이 아닌, 유럽의 역사와 빛이나던 시대의 분위기를 함께 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조금만 떨어져 생각해보면 조각상이 지닌 아우라는 유럽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렇다면 서구의 역사와 빛이 투영된 조각상이 한국에서도 같은 의미를 담고 있을까? 물론 서구 사대주의에 스며들어 있기 때문에 조각상을 중요하게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조각상이 지니는 의미가 한국에서도 통용될 수 있을까? 만약 조각상이 유명해지기 전에 한국에 왔다면 우리는 어떤 단어로 평가를 내릴 수 있을까? 과연 외국에서와 마찬가지로 긍정적이었다고 확신할 수 있을까?

 

<고스트 시리즈> 신미경, 비누, 가변크기, 2007-2013


작가는 탈맥락화된 박물관 유물 사이에 출몰한 제국주의 이데올로기의 유령을 미술 교육 제도에서도 찾아낸다. 젊은 미술학도들은 고대 그리스 로마 조각을 정해진 시간 안에 사실적으로 데생하는시험을 통과해야 미술대학에 입학할 수 있다. 그런데, 수많은 미대 지망생들이 제도권 미술계에 진입하기 위해서 피나는 노력을 쏟아 붓는 대상이 왜 하필 ‘고대 그리스’와 ‘르네상스 이탈리아의 인물상’일까? 작가는 아테네 여행 중 한국과 거의똑같은 방식으로 이젤 위에 화판을 놓고 석고데생을 하는 그리스 미술대학의 실기수업을 참관하면서 느낀 놀라움을 회상하면서 “그들이 같은 대상에 부여하는 의미는 우리와 어떻게 다를까”라고질문을 던진다. 
출처: 신미경의 <트랜스레이션>에 관하여


신미경은 이처럼 다양한 질문을 낳는 유럽의 조각상을 이방인의 신분으로, 원본에서는 사용하지 않는 비누를 이용해 번역한다. 그래서 본래는 대리석이었던 딱딱한 조각상을 비누로 만든다. 그리고 그 비누를 실제로 사람들이 쓸 수 있게 화장실에 배치하기도 한다. 그래서 작가의 조각은 쉽게 변형된다. 숭고하고 기품 있는 대리석이라는 물질이 아무 곳에서나 볼 수 있고 누구나 사용할 수 있는 비누로 전환되면서, 조각상에 다양하게 따라오는 평가의 언어들 또한 비누에 맞는 언어로 번역된다. 다양한 국가에서 작가의 작품이 좋은 평가를 받는 이유는 아마도 이처럼 항상 정답이라고 생각해왔던, 누구도 의식하지 못했던 간단하고도 명료한 상식이 정답이 아니었음을 알려주기 때문일 것이다.


작가는 이기심과 통용되는 판단 기준을 내려 놓고 새로운 눈으로 세상을 바라봤다. 세상과 관계를 맺기 위해, 자신의 작업과 관계를 맺기 위해 작가 자신의 판단을 내려놓은 것이다. 이는 스스로 가지고 있는 정답과 물음에 대한 회의가 없다면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작가는 이처럼 회의하는 과정을 통해 자신만의 번역 체계를 만들어갈 수 있었고, 상대방(서구권 문화)이 만들어놓은 아우라를 해체하는 작업을 할 수 있었다.

 

<비누로 쓰다-좌대 프로젝트> 신미경, 비누, 3x1.7x2m,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 2013-2014

작가의 작업을 통해 주체적으로 만들어가는 관계가 무엇인지를 느낀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주관적인 잣대를 의심함과 동시에 반성을 통한 자신만의 번역 체계를 만들어가며 새로운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 아마 그것이 우리에게 필요한 관계 맺기의 정답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십사

안녕하세요, 십사입니다.
미술, 만화영화, 춤, 피천득님, 법정스님을 좋아합니다.
살아있음을 기쁘게 여기며, 지혜롭고 성실하게 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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