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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이 좋은 이유,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

16.10.22 0

아담의 창조(The Creation of Adam), 미켈란젤로, 1511~1512,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인간은 모두 같다. 하지만 어릴 때는 인간이 각자 다르게 생겼기 때문에 서로 다른 사고 체계를 가졌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단순히 저 아이가 입고 있는 옷이 내 거보다 비싸면 더 행복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 아이의 엄마는 학교를 마친 아이들이 헐레벌떡 집으로 뛰어 올 때, 맛있는 음식을 직접 줄 수 있어 행복해 보였고 그 아이 역시 엄마의 음식을 먹을 수 있어 행복할 거라고 생각했다. 수많은 잡지가 우리를 유혹하고, 텔레비전에서 많은 것들이 구매 욕구를 불러일으킬 때마다 남과 너무나도 다르게 사는 내가 비루하게 보였다. 그리고 저기에 나온 사람들은 나보다 행복할 것이라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아니, 사실은 그런 생각을 인정할 수가 없었고 애초에 하고 싶지도 않았던 것 같다.

 

 

인생의 꿈(The Dream of Human Life), 미켈란젤로, 16c경,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그래서일까. 한때는, 꿈과 희망보다 현실을 택하는 사람이 자기 인생을 불순하게 사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제는 현실보다 꿈을 택하는 것이 항상 옳다고 말할 수가 없다. 그래도 여전히 꿈에 대한 갈망이 남아있다. 이제 나는 타인들의 인생에 뭐라고 할 수 없음을 느낀다. 현상은 다르나 본질은 같다. 우리는 사람이기에, 함께 이 세상에 숨을 쉬고 있기에 인간이라는 본질은 변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의 인생을 쉬이 비난할 수도, 내 인생을 쉽게 놓을 수도, ‘절대 이해가 되지 않아’라고 말할 수도 없다.

인간은 늘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을 위해 노력한다. 그러나 더 나은 삶을 갈망해 노력하다 보면 똑같은 풍경이 펼쳐진다. 잘 계획해서 갔다고 하지만 계획대로 되지 않는 순간의 혼돈은 버티기가 힘들다. 그래서 ‘꼬일 대로 꼬인 인생’이라고 생각할 찰나, 누군가와 5분만 대화를 나눠보면 모두 같은 고민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결국 나도 인간, 상대방도 인간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노래를 하고 글을 쓰며 그림으로 표현하는 삶의 모습이 공동으로 읽히는 건, 인생을 사는 우리의 모습이 서로 비슷하기 때문이리라.

 

천지창조 : 노아의 감사제물, 원죄와 낙원에서의 추방, 심문과 벌을 받는 아담과 이브, 1508~1512,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어릴 때는 왜 고전이 좋은지 알 수 없었다. 고전을 읽는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도 잘 몰랐고 내용도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늘 1/3 정도를 읽다가 책을 덮곤 했다. 그런데 어른이 되니 왜 ‘고전이 고전인지’를 굳이 알 수 있었다. 물론, 아직 많은 책을 읽어보지는 못했지만 내가 지금 갖고 있는 고민이 단지 나만의 것이 아니며 수 세기 전의 누군가도 나와 같은 고민을 했었다는 걸 안다. 특별할 것도 없이 내가 가진 고민은 너무나도 진부하고, 일상적이므로 과거의 사람들이 책과 그림으로, 혹은 노래로 표현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러고 나니 그동안 나 혼자만 덩그라니 떨어져있는 기분이 아니라 타인과 지속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아주 조금은 마음이 편해졌다. 그리고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다른 사람들의 일상도 나와 같은 고민(예를 들면, 대학원을 빨리 졸업하고 일을 하고 싶다거나 예쁜 옷을 갖고 싶다거나, 저녁밥은 풍성하고 멋진 음식을 먹고 싶다거나, 전쟁이 나지 않았으면 좋겠다거나)을 하고 있을 것이라고 느끼게 되었다. 단지 각자 딛고 있는 땅이 다르거나 김치대신 치즈를 먹거나, 옷 대신 나뭇잎을 걸치는 것처럼 외형만 다르다는 사실을 알았다고 해야 할까. 그러니 타인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은 잘못된 말이다. 즉, 타인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은 –나와 비슷한- ‘타인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말이다.

 

물론, 약간 약간의 예외가 있겠지만 우리는 누군가와 함께 소통하지만 그들보다 내가 좀 더 나은 삶을 살았으면 좋겠고(그러나 그들의 아픔을 이해하고 온화한 사람이길 바라며), 누군가에게 적이 되지 않고 나를 지키는 방법을 알고 싶어 한다. 하지만 우리는 이런 생각을 ‘나만 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니 우리는 얼마나 외로운가. 이 외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인간이 지닌 ‘공통성’을 인정하고, 지금 당장 살아 있는 서로의 마음을 이해해주어야 한다. 남이 나이고, 내가 남이다.

 

<최후의 심판(Last Judgment)> 1,370 × 1,220 cm, 1536-1541,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물론 수많은 고전작품이 존재하지만, 그 중에서도 인간에 대한 통찰이 엿보이는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이 유독 기억에 남는다.

 

미켈란젤로는 1533년 중순 당시의 교황 클레멘스 7세로부터 시스티나 성당의 제단 위 벽에 최후의 심판도를 그리라는 명을 받았다. 클레멘스 7세가 이 그림을 주문한 것은 신성로마제국군에 의한 로마의 점령과 약탈 등 재난의 연속에 대한 분노의 감정을 달래기 위한 것이었는데, 1534년 교황의 사망으로 이 작업은 일단 중지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클레멘스 7세의 뒤를 이어 교황이 된 바오로 3세가 다시 이 작업을 의뢰함으로써 1535년 4월 16일 발판의 조립이 시작되었다. 그리하여 1541년 가을, 면적 167.14m2의 벽면에 인간이 취할 수 있는 모든 모습을 한 총 391명의 인물상이 드러났다.

이 작품은 미켈란젤로에 의한 《신곡》이라 할 수 있다. 단테가 그 생애 중 만난 사람들을 평가하여 지옥, 연옥, 천국에 그 위치를 매긴 것처럼 미켈란젤로는 시각적 표현에 의하여 심판자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천상의 세계에서 지옥의 세계로 차례를 매겨 나간 것이다. 일반적으로 이 그림은 크게 천상계, 튜바 부는 천사들, 죽은 자들의 부활, 승천하는 자들, 지옥으로 끌려가는 무리들의 5개 부분으로 나눈다.

- 출처: 두산백과

  

<최후의 심판(Last Judgment)> 확대,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391명의 사람들이 그려져 있지만 어느 하나 어색하지 않은 이유는 (그리고 어디서 본 것 같은 표정인 이유는) 아마도 저들의 모습이 우리 마음속에도 존재하는 모습이기 때문일 것이다. 가끔은 즐겁고, 가끔은 슬프고, 또 가끔 위태로운 우리의 모습이 미켈란젤로의 그림에 표현되어 있다.

 

흔히 자신의 삶이 비루하고 지겹다고 느낄 때 사람들은 불안을 느낍니다. 오늘과 내일이 다르지 않은 똑딱거리는 일상생활 속에서 사랑과 변용의 힘은 지극히 축소되고 억제됩니다. 이런 일상들이 계속되면 자신의 신체를 뒤바꾸고 존재를 이동시키는 사랑의 방법과 변용의 힘을 잃게 되어 결국 유연하게 상황과 사람을 직면하는 능력을 상실하게 됩니다. 불안은 그때 찾아오죠. 이럴 때일수록 능동적이고 긍정적인 사랑과 변용의 힘에 따라 움직여야 합니다. 불안을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사랑하는 길뿐이며, 욕망의 흐름에 몸을 맡기고 색다른 삶을 살아가는 길뿐입니다.

- 출처: <눈물 닦고 스피노자> 신승철 지음, p. 34.


어찌됐든 인간의 삶이 모두 비슷하다는 사실을 아는 한 우리는 외롭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실을 몸소 깨달았다면 움직여야 한다. 지구 전체로 보았을 때는 보잘 것 없지만, 지금 내가 가진 것은 내 몸 하나 밖에 없으므로 나는 더 성실하게 사람들을 이해하며 살 것이다. 어쨌든 삶이란 누군가와 끊임없이 소통해야 하며 자신 안에 갇힐 때 너무 좁아지는 법이니까 말이다. 그래서일까, 미켈란젤로의 그림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결국 모두 한 사람이 지닌 모습처럼 느껴진다.

십사

안녕하세요, 십사입니다.
미술, 만화영화, 춤, 피천득님, 법정스님을 좋아합니다.
살아있음을 기쁘게 여기며, 지혜롭고 성실하게 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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