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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함의 미학

15.05.08 0

 

우연찮은 기회로 전공과는 전혀 다른 일을 시작했다. 본투비 예술 워너비! (세일러문 포즈와 함께!)라고 생각했는데 이상과 현실의 합일은 역시나 어려운 일인가 보다. 항상 봐왔던 색면과, 흐드러지는 인물 군상, 자유롭게 나부끼는 물감의 자욱은 모두 사라지고 이제부터 내가 봐야 할 대상은 기계, 기계, 기계였다.

- 이런 것들이 수십 수백 가지가, 그것도 사이즈는 각각 다르게 존재하고 있었다. 전동 모터라니, 미니카에 돌리고 끼우던 그 모터밖에 생각이 안 난다. 게다가 나는 그 미니카도 만들 줄 모르던 불량(?)초등학생이었다, 출처 : http://en.wikipedia.org/wiki/Electric_motor

 

 

 

 

보통 ‘기계를 다루는 일’ 이라고 하면 굉장히 투박하고, 거칠고, 날카로워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뭣도 모르고 거래처에 다니기 시작한 기계 생 초보 여직원이 마주하는 나날은 너무나 생경한 일의 연속이다. 갓 발급받은 주민등록증의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포기해버린 전기에너지와 열 에너지, 전압과 전류의 개념을 황급히 숙지하고 인버터니 몇 RPM이니 하는 숫자 (그렇다. 가장 큰 문제는 숫자였던 것이다!)들과 마치 길드 번개 모임이라도 하듯 급하게 조우하는 일은 거의 매일이 ‘울고 싶은 날’의 연속이다.

 

그러던 어느 날, 어느 공단에 있는 거래처에 잠시 들렀다. 사장님은 커다란 모니터 앞에 앉아 쉴 새 없이 마우스를 클릭하고 있었다. 그는 42톤에 육박하는 모터와 감속기의 도면을 한 달 째 작업 중이라고 했다. 연신 확대, 축소 버튼을 번갈아 눌러가며 세부베어링이 들어가는 지점까지 하나하나 선을 따는 사장님과 그렇게 조금씩 완성돼가는 도면을 바라보니 새삼 ‘완벽의 아름다움’을 느꼈다.

 

같은 기분을 느껴본 적이 있다. 금사로 만든 베일을 흩날리는 관음보살이 금방이라도 살랑거릴 것 같은 버들가지를 들고 있는 ‘탱화’에서 말이다. 고려시대 사람들은 탱화를 그리는 것 자체가 종교적 의례였고 수행이었기에 그야말로 고행하듯 세밀화를 그렸다. 그런데 이러한 세밀함과 정교함을 기계 도면에서 마주칠 줄이야!


- <Mechanical Head (The Spirit of Our Time)>, Hausmann, 1920, 출처 : https://www.pinterest.com

 

 


- <Tatlin at Home>, Hausmann, 1920, 출처 : http://www.mutualart.com

 

 

전쟁이 휩쓸고 간 20세기 초, 유럽에서 드디어 다다(DADA)가 등장했다. 부르주아 사회와 민족주의를 전복시키기 위한 이 무의미한 단어 다다(DADA)는 베를린, 하노버, 쾰른, 뉴욕, 파리를 거점으로 순회하며 진행됐다. 그리고 전쟁이 심화되며 발전한 기계문명에 대해 다다 작가들은 매우 상반적이고 모순적인 반응을 보였다. 특히, 하우스만(Raoul Hausmann, 1886~1971)은 이러한 양상을 대표적으로 보여준 작가다. <우리 시대의 정신>은 일종의 조각 혹은 앗상블라주(assemblage, 일상품을 한데 모아 구성한 미술품)로도 볼 수 있는 작품인데 얼굴 모형 자체가 옷가게나 미용실에서 볼 수 있는 마네킹으로 표현됐다. 또한, 주위에 계량컵, 줄자, 숫자 텍스트를 함께 배치해 사람이 사람으로 보이기 전에 계산적이고 물질적으로 보는 당시의 세태를 비꼬았다. 눈과 귀가 모두 막힌 채 오직 숫자로만 돌아가기 시작한 20세기 초의 분위기를 어느 정도 반영하고 있는 작품인 것이다.

 

또한 러시아 전위주위자 타틀린(Vladimir Evgrafovich Tatlin, 1885~1953)을 연상시키는 제목의 <Tatlin at Home>은 러시아 혁명과 기계, 그리고 건축에 긍정적이었던 타틀린의 모습을 통해 앞으로의 사회가 과학과 기술, 기계와 함께 발전할 것을 ‘절망적으로’ 나타냈다.


- <Ici c'est ici Stieglitz foi et amour (Here It's Here Stieglitz Faith and Love)>, Picabia, 1915, 출처 : http://www.dadart.com

 


- <L'Enfant carburateur (The Child Carburetor)>, Picabia, 1919,
출처 : http://www.guggenheim.org

 

 


반면 같은 다다이스트면서도 ‘기계’ 그 자체를 너무나 사랑했던 작가도 있다. 유럽과는 달리 전쟁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지 않았던 미국, 특히 뉴욕에서 활동했던 다다이스트 피카비아(Francis-Marie Martinez de Picabia, 1879~1953)는 기계와 기계 산업을 긍정적인 측면에서 바라봤다. <여기에 스티글리츠가 있다>는 동시대 함께 활동했던 사진작가 스티글리츠(Alfred Stieglitz, 1864~1946)의 초상화를 기계로 표현했다. 뚜껑 열린 고장난 카메라와, 기어가 중립으로 놓여있는 자동차의 기어박스는 스티글리츠의 신념이 마치 고장난 카메라처럼 실현되지 못했음을 은유적으로 드러낸다. 피카비아는 기계를 통해 주인공의 성격이나 특성까지 담아내려고 함으로써 ‘기존의 것을 파괴하고 새로운 것을 제시한’ 대표적인 다다이스트로 자리매김했다. 또한 자신의 초상화 역시 자동차의 클랙션과 브레이크로 표현했는데(L'Enfant carburateur) 시끄러운 경적소리와 급정거를 떠올리면 자연스럽게 유추해볼 수 있는 피카비아의 성격을 탁월하게 표현했다.

 

- 같은 방식으로 뉴욕에서 함께 활동하던 다다이스트 데 자야(Marius de Zayas Enriquez y Calmet, 1880~1961)의 초상과 함께 여러 사람들의 ‘기계적 초상’을 남겼다, 출처 : http://en.wikipedia.org/wiki/Francis_Picabia

 

 

 

미술에 기계가 등장한 배경은 산업혁명과 맞물린다고 볼 수 있다.그리고 기계에 대한 관심은 이탈리아에서는 미래주의, 뉴욕에서는 다다와 함께 나타났다. 많은 작가들이 ‘기계’ 자체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보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피카비아가 이토록 기계에 열중했던 이유는 그저 ‘주위를 둘러보니 보이는 게 다 기계여서’ 때문은 아니었을까?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소재를 선택해 기존의 것을 탈피하고자 한 움직임에서 피카비아의 작품은 나름의 의의를 가진다.

 

분명 금속은 차갑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자꾸 그 딱딱 맞아 떨어지는 톱니바퀴의 완벽한 움직임에서, 그리고 단 0.1mm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완벽함에서 왜 나는 자꾸 편안함과 안정감을 느끼는 걸까? 잘은 모르겠지만 아마도 시간이 조금 더 흐르면, 기계와 따숩게 잘 지낼 수 있을 것 같다는 좋은 예감이다.

 

 

김월

나의 글이 사람들에게 즐거움과 영감이 되길 바랍니다.
예술과 친근한 세상을 만들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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