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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회주의자 혹은 리얼리스트!

15.10.05 0

 

미술사에 이름을 남기는 데 큰 기준이 되는 것은 ‘기존의 것을 전복시키고 혁신을 이루었는가’다. 쉽게 말해 완전히 새로운 흐름을 탔느냐 이거다. 혹은 누가 보아도 정말 ‘천재적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는 작품을 창조해냈는가’도 미술사 속 인물이 되는 방법 중 하나다. 파격과 발견, 새로운 시도와 놀라운 아이디어들은 두꺼운 미술사 서적 속에 하나도 빠짐없이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앞서 말한 두 가지와 또 다른 기준이 있다. 바로 ‘시대상을 얼마나 반영했는가’다. 시대상이란 정치, 경제, 역사를 아우르는 모든 상황을 일컫는다. 시대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작품은 그 자체만으로도 후대의 사람들이 당시의 삶의 모습을 이해할 수 있는 증거가 된다. 그래서 이 기준에 부합하는 작품들은 굳이 새롭거나 독특한 시도가 아니더라도 그대로 미술사의 여러 페이지를 차지할 수 있는 것이다.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 (The Oath of the Horatii)> 다비드, 1784

 

18세기가 저물어가던 무렵, 인간의 꿈과 정신을 담는 낭만주의가 대두됐다. 그런데 이 낭만주의가 의의를 가질 수 있었던 건 그보다 살짝 뒤로 맞물린 시기에 존재했던 신고전주의를 완전히 뒤집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신고전주의 시대의 화가들은 자신들의 작품이 감상자의 행동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사회적 역할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제국을 건설하고자 했던 여러 나라의 왕족들의 입맛에 딱 맞았다. 철저히 귀족적이고 정치적이며 충성스러운 미술이었던 것이다. 작품이 더 이상 장인-도제의 관계에서 전승되는 것이 아니라 ‘아카데미’ 라는 왕실 관리 하의 정식 교육기관이 되자 화가들은 이 주류에 편승하기 위해 무진 애를 썼다. 매년 열리는 작품전시회에서 좋은 평가를 받아야 더 많은 고객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자연스럽게 화가가 그리는 주제는 화가가 그리고 싶은 것이 아닌, 당대의 취향에 부합하는 것으로 제한됐다. 거대 제국의 일원이 된 귀족들은 애국적이고 영웅적이며- 반대로 말하자면 화려하고 가식적인 그림을 원했다. 그랬으니 왕족들은 어땠겠는가. 자신들을 신격화하기 위한 도구로 신고전주의 회화의 장대함은 필수적이었다.

 

 

<나폴레옹의 대관식 (The Coronation of Napoleon)> 다비드, 1806


이 흐름을 제대로 탄 화가로 자크 루이 다비드(Jacques-Louis David, 1748~1825)를 꼽을 수 있다. 프랑스 혁명 이전부터 나폴레옹에 이르기까지 중요한 영향력을 발휘했던 화가이자 정치가로 ‘미술계의 나폴레옹’ 이라는 별칭까지 붙었을 정도다. 다비드의 작품은 대체로 대규모 (평균적으로 가로 세로가 각각 2미터가 넘는다)로 제작되었는데, 아주 세밀하고 정교한 표현은 제국이 원했던 엄격한 도덕성과 애국적인 숭고함을 그대로 반영했다. 그 어느 부분에도 빈 틈을 두지 않은 대작은 보는 이로 하여금 장엄함까지 느끼게 하는데, 이 장엄함은 자연스럽게 국가주의로 발현된다.

 

 

<베르나르 산을 넘는 나폴레옹 (Napoleon at the Saint-Bernard Pass)> 다비드, 1801


어디선가 한 번쯤은 보았을 <베르나르 산을 넘는 나폴레옹>은 나폴레옹을 신성로마제국의 샤를마뉴 대제, 로마의 한니발 장군과 동일시하고 있지만 재미있는 점은 나폴레옹은 이 산에 한 번도 오른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다비드는 나폴레옹의 두터운 신임을 받아 예술장관으로 임명되기도 했는데, 시대의 입맛에 맞는 그림으로 화가가 유력 정치인으로 탈바꿈하는 순간이다. 제국 수석화가로 임명된 다비드는 이후에도 여러 신고전주의 회화를 그렸데 의도는 뚜렷했다. 도덕적 의무를 충실히 했던 고대 로마의 시민들처럼, 제국 시민이자 지식인인 당대의 사람들이 ‘국뽕’ 을 맞길 원했던 것이다. 다비드를 위시해 나폴레옹이 등용한 작가들이 그려낸 작품을 보고 있자니 ‘북쪽의 젊은 친구’가 어렴풋이 겹쳐진다. 위대한 군인이나 혁명가로서가 아니라 열등감에서 비롯된 정통성에 대한 집착에서 말이다.

 

 

<비너스의 탄생 (The Birth of Venus)> 카바넬, 1863


아카데미는 1562년 피렌체에 처음으로 설립되었는데 그 이후로 가장 활발한 활동을 한 곳은 다름아닌 파리였다. 신고전주의의 시대가 나폴레옹과 함께 저물어가고 다시 시작된 19세기 왕정 시대에 예술은 그저 상류층의 유희에 불과했다. 심지어는 ‘가장 무능하고 보수적이었다’ 라는 평을 들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고전이나 역사, 신화에서 주제를 따 왔지만 그림은 철저히 기술적이고 가식적이다. 완벽해 보이는 비너스의 뽀얀 몸매나, 클레오파트라의 투명한 살결, 완벽한 얼굴은 어느 한 군데도 흠잡을 곳이 없지만 알맹이는 텅 비고 껍데기만 존재하는 느낌이다. 분명 눈으로 보기에는 ‘예쁘게 잘 그린’ 그림인데도 말이다. 거기에는 감동이 아니라 오직 한 순간의 감탄만 존재할 뿐이다. 실제로 신화 속 나신의 미녀들을 담아낸 부게로(William-Adolphe Bouguereau, 1825~1905)의 작품들은 수집가들에게 어마어마한 값에 팔려 나갔으며 수 많은 추종자들을 양산했다. 그런데 현재 이 ‘아카데미 풍’ 화가들을 수식하는 단어는 부정적인 인상이다. 오로지 대중의 입맛에 맞는 기술과 소재로 부유한 고객들의 눈을 행복하게 했던 탓이다.

 

 

 

<죄수들에게 독약을 실험하는 클레오파트라 (Cleopatra Testing Poisons on Condemned Prisoners)> 카바넬, 1887

<파도 (The Wave)> 부게로, 1896

 

<비너스의 탄생 (The Birth of Venus)> 부게로, 1879


윌리엄 부게로의 일생을 찾아보다 그가 사망한 시기가 20세기 초라는 것을 발견했다. 그렇다면 그는 분명 노년에 이르렀을 때 낭만주의와 사실주의, 인상주의가 태동하고 빛나는 것을 직접 눈으로 확인했을 것이다. 오로지 고객의 입맛에 맞는 그림을 그려 온 ‘기술자’ 로서, 부게로나 카바넬(Alexandre Cabanel, 1823~1889)은 과연 어떤 생각을 했을까. 다비드나 앵그르(Jean-Auguste-Dominique Ingres, 1780~1867), 카노바(Antonio Canova, 1757~1822)같은 신고전주의의 작가들은 본인들이 직접 정치에 관여했고 정부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기에 어느 정도는 본인들의 의지에 따라 작품활동을 했지만, 아카데미가 주최하는 살롱에 합격해야만 생계를 이어갈 수 있었던 작가들에게 과연 변화와 파격의 시대는 그들에게 어떤 생각을 안겨줬을지 궁금하다. 그들은 시류를 탁월하게 타고 난 기회주의자였지만, 사실은 당대의 어두운 면까지 보여준 리얼리스트는 아니었을까. 그리고 싶은 것이 아니라 그려야 하는 것을 창조하고, 그것을 보며 기뻐하는 대중의 모습을 보며 작가는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망설였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미술사에서는 이들을 편협한 기회주의자라고까지 이야기한다. 그런데 이제 와서 다시 생각해보니 얌전히 갑의 횡포에 순응할 수 밖에 없는 우리들의 모습이 겹쳐진다. 기회를 잡았지만, 지극히 현실을 살기 위해서였고 삶이 아니라 생을 살아가기 위함이었다고 생각하면, 그때나 지금이나 영 달라진 것은 없구나 하는 생각에 저 예쁜 그림들을 멍하니 바라 볼 뿐이다.

 


출처

다비드 https://en.wikipedia.org/wiki/Jacques-Louis_David
카바넬 https://en.wikipedia.org/wiki/Alexandre_Cabanel

부게로 https://en.wikipedia.org/wiki/William-Adolphe_Bouguereau

 

김월

나의 글이 사람들에게 즐거움과 영감이 되길 바랍니다.
예술과 친근한 세상을 만들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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