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전을 시작했다.

15.08.03 0

 

운전을 시작했다. 장롱에서 몇 년 째 묵어가던 나의 면허증은 이제야 세상 빛을 보고 있다. 혹시나 싶어 받았던 도로연수에서 선생님은 웃으며 ‘감이 있네요.’ 라고 하셨지만 실전은 냉혹했다. 깜빡이를 켜지 않은 채 내 앞으로 돌진하는 차, 브레이크 등을 고치지 않아 뒤따라 가는 길을 당황스럽게 하는 차, 그리고 <매드 맥스>를 방불케 하는 거대한 화물차까지. 이제 갓 핸들을 잡은 초보운전자에게 도로는 차가운 전쟁터나 다름없었다. ‘이 미천한 것을 용서하시고 살려주시옵소서! 아이고 아이고 차주 나으리 이 생초보 때문에 길이 막혀 송구합니다요’ 가 단 네 글자로 함축된 ‘초!보!운!전!’ 이게 내 유일한 비빌 언덕이자 친구였다.


<도로, 뒤집어 보면> Dani-graphy, 출처: http://www.notefolio.net/dngrp/18771

 

 


시간은 모든 것을 해결해준다고 했던가. 핸들 조작이 가벼워지고 중간중간 라디오 채널을 바꿀 수 있을 정도의 여유가 생기자 그제서야 도로가 환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빨리 앞서가려는 차는 여유 있게 비켜주고, 속도가 느린 차는 적당히 추월하고, 뒤따라 붙으면 안되겠다 싶은 차는 조금 간격을(화물차와 사고가 나면 내 목숨이 위험하지만, 외제차와 사고가 나면 내 통장도 위험하다.) 띄어 주기도 하면서 초조함을 살짝 내려놓았다. 언젠가 어렸을 때의 내가 바라던 어른으로서의 모습이 바로 지금인 것만 같아 혼자 웃기도 한다.


‘내가 어른이 되었구나’ 라고 느낀 건 스무 살 무렵의 어느 날이었다. 여행 중에 지갑을 통째로 잃어버려 수중에 동전 몇 개만 남아있던 상황이었다. 호스텔 주인에게 사정해 스카이프에 접속했고, 나는 그냥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리고 한 3초 지났을까, 문이 활짝 열리듯 아! 하고 큰 깨달음이 밀려왔다. 나는 그 호스텔 주인의 도움을 당연하게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내 일이니 당연히 내가 해결해야 하는 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제서야 바쁘게 한국에 있는 가족과 은행 고객상담실에 연락했다. 그렇게 몇 번의 서류가 오가고 현지 은행을 직접 방문하면서 성인으로서의 부담감과 무게를 온 몸으로 깨달았다. 그리고 빨리 진중하고 능숙하게 일련의 사건들을 처리하는, 문제가 발생해도 흔들리지 않고 여유 있게 처리하는 ‘진짜 어른’이 되기를 간절히 바랐다.


<어른 왕자> 조은형, 출처: http://www.notefolio.net/goodbrother/13264

 

 


대학에 막 들어갔을 때의 내가 보던 4학년 언니들을 생각해본다. 카페에 앉아 멋진 학문적 용어들을 섞어가며 대화를 나누는 그들의 모습은 얼마나 프로페셔널 했는지. 논문 주제를 토론하며 사회인이 될 준비를 하는 그들은 마냥 멋져 보였다. 그런데 내가 직접 그 시간을 지나와보니 그게 얼마나 웃긴 ‘신입생 자체보정 필터’(실제 대화: “야 논문 어떻게 쓰는 건데!!!!! 몰라, 나도!!! 써 본적이 있어야 알지!!!”)였는지 이제야 깨닫는다. 그리고 이 나이쯤 되면 당연히 멋진 커리어 우먼이 되어 나만의 집과 나만의 차를 가지고 완벽히 드라이를 마친 단발머리로 또각 또각 걸어 다닐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현실은 내 얼굴형에 숏 컷을 끼얹는다는 게 아바다 케다브라 마법(=저주)을 스스로에게 쏘는 것과 하등 다를 게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이제 누가 봐도 성인인 나이가 되고 보니 어렸을 때는 왜 그렇게 어른이 되는 것에 집착했나 싶다. 시간이 조금만 지나면 세일러문이 변신하는 것처럼 한 큐에 멋진, 여유 있는 어른이 될 줄 알았던 모양이지. 이 나이가 되어서도 불완전할 수 있다는 것을 그때는 인정하지 못했는데, 매일매일 밥을 먹고 살과 키를 키워가며(물론 이제 키는 잘 크지 않지만)많은 사람과 많은 대화를 나누며 아주 천천히, 디스크 조각 모음 하듯 어른이 되어가고 있다. 공문서를 처리하고, 은행과 보험사, 구청과 동사무소를 스스로 드나들며 나는 느리지만 꾸준한 속도로 어른으로서의 레벨을 올리고 있다.


<봄날의 휴식>©greenut(Hye ryeon Kim) Pen, Watercolor on paper & Photoshop CS6, 135 x 200 mm, 2015, 출처: http://www.notefolio.net/greenut/34292

 

 

빨리 성숙해지고 싶고, 빨리 어른이 되고 싶고, 빨리 나라는 인간이 완전해지길 바랐던 지난 날의 나와, 그리고 지금도 그렇길 바라고 있는 많은 젊음들에게 말하고 싶다. 한번 객관적으로 본인의 삶을 관찰해 보는 것도 괜찮은 방법이라고. <프린세스 메이커>에서 딸을 육성하던 기억이 있는지? 그 게임 속 플레이처럼 천천히 이것저것 경험해가며 어떤 경험이 내게 즐거운지, 또 어떤 일이 내게 잘 맞고 어울리는지 제 3자의 눈으로 살펴보길 바란다. (물론,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그 과정 동안, 나라는 인간을 어른으로 키우는 게 생각보다 꽤 재미난 일이 될지도 모른다. 낙엽 굴러가는 걸로도 깔깔 웃어제꼈던 어린 마음들이(물론 아직도 술을 마시면 가만히 서 있는 전봇대가 세상에서 가장 웃기다)지금 이대로를 즐기고 더욱 더 충실히 살 수 있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Happy> 양윤, 2014, 출처 : http://www.notefolio.net/classyzyang/18951

 


그렇다고 해서 지금 이 글을 쓰는 내가 ‘진짜 어른’ 이라는 건 절대 아니다. 위의 조언은 그저 밥 몇 그릇 더 먹은 사람으로서 하는 것이고, 아마 내일 통근길 고속도로 IC 진입도 ‘엉엉 도와주세요! 엉엉 죄송합니다, 못난 초보를 봐주십시오!!’의 연속이 될 게 뻔하다. 하지만 분명한 건 그러면서 나는 천천히 베스트 드라이버가 될 것이고, 또 언젠가는 주차의 신이 될 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조바심 내지 말고 천천히, ‘시나브로’ 라는 말처럼 나아가는 우리가 되길! 피스!

 

 

김월

나의 글이 사람들에게 즐거움과 영감이 되길 바랍니다.
예술과 친근한 세상을 만들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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