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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치고, 떠들고, 생각하라 下: 붓을 뽑아 든 여자들

15.06.10 1

나날이 메르스 확진 환자가 늘어가는 가운데 디씨인사이드에도 메르스 갤러리(지금은 ‘결혼 못하는 남자’ 갤러리로 이주했다는 게 유머 아닌 유머)가 생겼다. 본인이 메르스에 걸린 줄도 모르고 건방지게 바이러스를 퍼뜨리고 다닌 ‘김치녀’는 잘 갈린 칼로 썩둑썩둑 잘도 썰려나갔다. 상황이 180도로 급 반전된 건 최초 감염자가 남자였다는 것이 밝혀 지면서부터다. 묵묵히 썰리고만 있던 김치녀들은 칼을 빼 들었다. 그다지 어렵지도 않았다. 그저 여태껏 들어왔던 말의 주체와 객체만 바꾸면 되는 일이었다.

 

- '여자나이가 25살이면 크리스마스'라던 그 간의 논리에 주체와 객체를 바꿨다.



같은 논리로 키보드 위에서 재생성되는 그녀들의 문장들을 보며 갑자기 떠오른 장면은 <킹스맨> 속 위풍당당 행진곡에 맞춰 펑펑펑 터지던 머리들이었다. 벌거벗은 임금님에게 거울을 들이댄 꼴이었을까, 혹은 세계에서 119위라는 성기 크기 데이터를 들이댔기 때문이었을까. ‘여혐종자’들은 침묵했다.

 

인터넷 속 작은 게시판에서의 해프닝이었을 뿐이다. 현실은 여전히 ‘저 X들이 나를 돈 없다고 무시했다’는 이유로 애인과 애인의 친구들을 살해한 70대 노인이 입건되는 나날이다. 남자가 사냥을 나가면 여자는 불을 피우며 집을 지켰다. 아주 오래 전부터 권력은 남자들의 전유물이었고, 역사는 ‘HIS’tory가 되었다. 뭐 미술 쪽도 별 다를 바는 없었다. 도제 식으로 운영되던 모든 공방들, 아카데미 시스템, 살롱, 학회.. 이 모든 곳들이 남성 위주의 시스템으로 돌아갔다. 여성의 존재는 99퍼센트 그림 속 주인공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던 1퍼센트가 있기에 이 글이 쓰일 수 있었다. 그 두꺼운 회벽의 천장을 뚫고도, 미술사의 영역에서 ‘살림을 차린’ 여자들은 분명 존재했다.

 

Self-Portrait as the Allegory of Painting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 1638-9
출처: http://en.wikipedia.org/wiki/Artemisia_Gentileschi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Artemisia Gentileschi, 1593~1656)는 최초로 정식 회원 자격을 부여 받은 여성화가였다. 마찬가지로 화가였던 아버지의 작업장에서 일찌감치 재능을 인정받은 그녀는 아버지의 친구인 아고스티노 타시(Agostino Tassi, 1578~1644)에게 개인 지도를 받았다. 그러던 어느 날, 열 일곱 살의 그녀는 타시에게 강간당했고, 이후에도 결혼을 미끼로 계속해서 농락당하게 된다. 결국, 모든 사실을 알게 된 아버지의 도움으로 법정에서 승소했으나 그녀에게 남은 건 ‘성폭행 피해자’라는 낙인과 스승을 고소해서 ‘배은망덕하다’는 딱지뿐이었다. 이와 같은 이유로 미술학교는 그녀의 입학을 거부했다. 아르테미시아는 쫓기듯 피렌체로 떠나야 했다. 그래서, 그녀가 다 포기하고 좌절했냐고?

 

Judith and Holofernes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 1620~21

Judith Beheading Holofernes 카라바조, 1598~1599, 출처: 위키피디아

 

 
답은 ‘아니오’다. 그녀는 절대 그림을 포기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강인하고 강렬하게 당당한 화가로서의 자신의 모습을 지키고자 했고, 그 생명력은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는 유디트>에서 강력하게 발휘된다. 앗시리아의 적장 홀로페르네스를 취하게 한 뒤, 칼로 그의 목을 베는 이스라엘의 유디트를 그린 이 그림은 카라바조(Caravaggio, 1571-1610)의 영향을 받아 명암대비나 한 쪽에서 쏟아지는 불빛, 천에 잡힌 주름의 묘사가 아주 정교하다. 그러나 카라바조와 가장 다른 점은 유디트의 표현에서 뚜렷하게 나타난다. 카라바조의 유디트는 노파가 시키는 대로 머뭇거리는 ‘예쁜 아가씨’ 인 반면, 아르테미시아의 유디트는 하녀까지 완벽하게 이 작업에 필사적으로 몰두하고 있다. 마치 아르테미시아 자신의 자화상이자 다짐처럼 보일 정도다. 강력한 힘을 가진 남성을 얼마든지 제압하고 이길 수 있다는 투쟁의 이미지가 반영된 이 그림은 아르테미시아 본인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분노와 고통이 투영된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의 그림에서 보인 강한 의지대로 피렌체 미술원에 최초로 입회한 여성 회원이 됐다. 그녀의 열정과 재능을 알아보고 인정한 많은 사람들 (메디치 2세, 미켈란젤로, 심지어 갈릴레이까지 모두 그녀의 예술적인 남사친이었다)에게 사랑 받으며 이탈리아 전역에서 왕성하게 활동했다. 당대의 어느 평론가는 그녀를 ‘이탈리아에서 그림을 아는 유일한 여자’ 라고 평가했으며 결국 그녀는 오늘에 이르러 ‘미술사에서의 최초의 여성’이 되었다.

 

Sleepy Baby 메리 카셋, 1910, 출처 : http://www.wikiart.org

 

 

19세기 프랑스, 유난히 친목도모가 심했던 인상주의의 남자들 사이에서 유일하게 동료로 인정받은 여성도 있다. 미국 부동산 재벌의 딸로 지금으로 치면 <가십 걸>을 배경으로 살았을 메리 카셋(Mary Cassatt, 1844~1926)은 상류층 자제답게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며 교양과 안목을 쌓았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의 재능이 그림에 있다는 것을 확신했다. 그녀의 부모님으로서는 혈압이 오를 일이었다. 어화둥둥 키운 내 딸내미가 (얌전히 시집이나 갈 것이지!) 그림을 그리겠다니! 그래도 금수저가 좋은 게 이 시절에도 마찬가지라 그녀는 곧 펜실베니아 미술원에서 공부를 시작했다. 그러나 아카데미 특유의 도제식 수업과 교사들의 무시로 인해 그녀는 곧 예술의 본고장인 파리로 이주했다. 아직 에콜 데 보자르(École des Beaux-Arts, 프랑스 미술 학교)에서는 여성의 입회가 허가되지 않았기 때문에 개인 교습을 받으며 같은 처지에 있는 여학생들을 돕는 활동 역시 카셋이 매진한 일이었다. 그 후, 프러전쟁(1870)으로 미국으로 돌아가게 된 그녀는 생각보다 잘 팔리지 않는 자신의 작품에 실망해 ‘다신 그림을 그리지 않을테얏!’ 하고 외치지만 ‘이젠 다시 술을 마시지 않을테얏!’ 하던 우리의 지난 밤 다짐처럼 1년 후에 다시 붓을 잡는다. 다행히 많은 이들이 그녀를 격려했고 용기를 얻은 카셋은 보호받지 못하는 여성작가들을 위해 목소리를 냈다. 그러나 돌아온 건 자신의 작품이 한 개도 걸리지 못한 살롱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성이기에 조성할 수 있었던 그림 속의 자애로움과 사랑, 그리고 다양한 재료와 기법이 가미된 작품들은 그녀가 인상주의 멤버로 인정받는 이유였다. 특히 드가(Edgar Degas)와는 예술과 문학에서 더없이 완벽한 파트너로 지냈으며 일명 “New Woman”으로서 ‘예술을 하는 여성’을 사회로 이끌어내는 데 큰 공헌을 했다는 평을 받았다.

 

 

La Loge 르누아르, 1874, 출처 : 위키피디아

 

Woman in Black at the Opera 메리 카셋, 1879, 출처 : 위키피디아

 

같은 ‘공연 관람석의 여자’가 주제지만, 르누아르의 작품 속 여성은 화려한 모습으로 남자들의 눈요기거리, 즉 ‘보여지는 존재’가 되는 것과 반대로 카셋의 여성은 망원경을 눈에 댄 채 오페라를 ‘감상’ 하고 있다. 같은 주제를 두고 젠더의 차이에 의해 그림이 달라지는 것은 젠틸레스키의 예와 마찬가지로 흥미로운 사실이다.

여전히 페미니즘/페미니스트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격한 단어로 인식하고 있다. 그리고 여전히 네이버 뉴스 댓글을 비롯한 여러 게시판은 남/녀로 나뉜 성별싸움이 벌어지고 있다. 거창하게 이 사태를 해결하려는 욕심은 없다. 물론 그럴만한 깜냥도 없다. 젠틸레스키와 카셋도 처음부터 이 더러운 미술판을 다 뒤엎어버리겠다고 나선 건 아니었으니까. 단지 고통 받는 너와 나, 당장 우리 옆의 누군가를 돕고자 먼저 목소리를 냈을 뿐이다. 여태까지 우리는 여성으로서/남성으로서 이렇게 해야 한다는 규정을 옆에 두고 살아왔다. 그런데 그 규정은 누가 만든 건지? 오롯이 나만의 것인 인생을 왜 꼭 ‘여자니까/남자니까 이래야만 해’라는 젠더의 틀 안에 가둬두었는지. 이미 만들어진 여성으로서의 행동양식을 굳이 따라갈 필요는 없다는 얘기다.

그래서 [설치고, 떠들고, 생각하라]의 마지막 글은 자신의 삶을 올곧게 직시하며 만들어갔던 또 다른 두 여성작가의 이야기로 채워보려고 한다. 메르스 갤러리에서 보여준 힘의 전복이 가져온 감정적 동요를 보라. 아, 굳이 혐오에 혐오로 맞설 필요는 없다. 그저 내가 한 ‘사람’의 여자로서 작지만 꾸준히 목소리를 내고 있음을 어필하면 그 정도로도 괜찮은 페미니스트의 ‘페’ 정도는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김월

나의 글이 사람들에게 즐거움과 영감이 되길 바랍니다.
예술과 친근한 세상을 만들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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