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텐베르크여, 타이포그래피 시대를 활짝 열어 주옵소서! - 1편

17.08.08 0

 

1. 무너진 세기 끝에서 발견한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

 

찬란한 로마시대가 끝나자 유럽은 어둠의 시대라고 칭하는 중세시대에 돌입하게 된다. 정교했던 행정체계가 무너지고, 내륙과 바다를 가리지 않는 약탈과 살인이 끊이지 않았다. 안전한 교역로가 없어지자 무역은 점차 단절되었으며, 심각한 물자 부족으로 사회는 점점 가난해졌다. 그야말로 ‘무너진 세기’였다. 

그렇다면, 중세 유럽인들은 이런 암울한 시대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었을까? 디자이너의 관점에서 바라보자면,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를 가장 큰 요소로 꼽고 싶다. 금속활자의 개발이 그동안 특정 계층만이 향유하던 인간지식을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빠르고 널리 전달함으로써 정보교환의 획기적인 발달을 이끌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금속활자의 탄생과정은 어떻게 이뤄졌을까.

 

 

▲ 구텐베르크는 금속활자가 세계의 끼칠 영향을 예상했을까?



2. 황금알을 낳는 산업인 금속활자 인쇄술

 

11세기 시작된 십자군 전쟁부터 13세기의 바투의 유럽 원정(몽골군의 유럽 원정)은 많은 사람들의 희생이 뒤따랐지만 유럽 경제와 금융자본의 성장을 가져왔다. 이탈리아 상인들은 쉴 새 없이 동방에서 물자를 실어 왔고, 몽골이 장악한 실크로드는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교역 루트가 됐다. 경제가 성장하고, 물자가 증가하면서 사치품에 대한 수요도 증가했다. 그중에서도 중세의 주요한 이데올로기였던 성경책은 부유한 귀족층에게 최고의 소장품이었다.

금속활자 발명 이전의 책은 고가의 귀중품이었다. (1424년 영국의 캠브리지 대학 도서관에는 122권의 필사본이 있을 뿐이다.) 약 200쪽짜리의 책한 권을 만들기 위해 오랜 시간 고된 작업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당시의 책은 필경사들이 직접 글씨를 손으로 써 가축의 가죽으로 만든 양피지에 옮기는 방식으로 제작됐다. 상당히 고가의 재료인 양피지로 만든 책이니(심지어 금과 보석으로 장식하기도 했다.) 부유한 귀족들만이 책을 소유할 수 밖에 없었다. 그만큼 책은 만들기만 하면 비싸게 팔 수 있는 고부가치 산업이었지만, 제작수량이 턱없이 부족했다. 때문에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 기술은 필경사를 거치지 않고 책을 대량으로 제작할 수 있는 최첨단 기술이었다. 금속활자 이전에 쓰이던 목판인쇄는 나무가 너무 약했기 때문에 활자제작이 힘들었고, 자간의 정확한 조정이 필요한 유럽에는 어울리지 않는 방식이었다. 이러한 배경으로 금속활자는 인쇄산업의 발전과 정보혁명을 이끌었다.

 

▲ 중세시대의 인쇄소의 모습

 

 

3. 금속활자로 나아가기 위한 몇 가지 단계

 

구텐베르크는 값비싼 책을 대량생산하기 위해 금속활자에 필요한 제반 시설을 다지기 시작했다. 활자기술에는 몇 가지 단계가 필요했는데, 첫째는 ‘내지에 어떤 타입의 페이스를 사용할 것인가?'였다. 그는 당시 독일 필경사들이 사용했던 정방형의 강한 서체인 ‘‘텍스투라 서체’를 기본으로 금속활자를 제작했다. 텍스투라는 블랙레터 서체 중 하나이며, 중세 유럽의 고딕 양식을 잘 드러내는 서체다. 아마도 강한 직선이 강조되어 힘과 권위가 느껴지는 서체로 교회의 권위를 잘 나타낸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둘째는 인쇄기술과 관련된 문제였다. 금속활자에 사용하는 주형(鑄型)은 모든 글자가 균일한 높이와 균형을 갖춰야 했다. 글자 뒤의 굽 높이가 균일해야 같은 세기로 눌러도 인쇄에 문제가 발생하지 않아서다. 때문에 알파벳의 서로 다른 넓이를 조절하기 위해 다양한 넓이의 구리 조각을 사용하기도 했다. 동시에 수백 수천 번을 찍어도 상하지 않는 내구성이 필요했다. 이를 위해, 활자주조에 알맞은 금속의 연성과 강성에 대한 긴 연구가 필요한 것은 물론이었다. 또한, 잉크를 바르고 찍어내는 과정에서도 금방 마르지 않으면서 번지지 않는 잉크와 그것을 바르는 기술이 필요했다

 

▲ 구텐베르크의 텍스투라 활자를 기본으로 인쇄된 42행 성경

 

 

4. 재주는 구텐베르크가 부리고 돈은 푸스트가 번다.

 

구텐베르크는 기술적 장애물을 극복하기 위해 막대한 재정과 시간을 들여 10여 년이 넘는 세월 동안 금속활자에 매달렸다. 결국, 활판인쇄를 처음 성공하고 그로부터 10년이 더 지난 1450년에 최초의 금속활자로 만든 42행 성경을 제했다. 하지만 구텐베르크는 금속활자 개발을 위해 마인츠의 부유한 은행가인 푸스트에게 1450년, 1452년 두 번에 걸쳐 돈을 빌렸다. 그런데 총 210부의 '42행 성경'이 완성되어갈 쯤, 푸스트는 구텐베르크에게 갑자기 원금과 이자를 변제하라며 소송을 냈다. 법원은 푸스트에게 유리한 판결을 내렸고, 푸스트는 구텐베르크 인쇄소를 통째로 빼앗는다. 푸스트는 곧바로 구텐베르크의 숙련된 조수 페테 쉬퍼와 계약을 맺고 남은 42행 성경의 작업을 완성한다. 결국 푸스트의 돈이 구텐베르크를 집어삼키게 된 것이다.

▲ 성서인쇄 장면을 묘사한 그림, 출처: 고인쇄박물관



5. 개인적 비극을 넘어 타이포그래피 시대의 서광으로

 

구텐베르크는 파산하고 사업도 빼앗겼으나, 금속활자 인쇄술은 독일을 넘어 점점 유럽 각 지역으로 퍼져나가게 된다. 특히, 독일에서 이탈리아로 넘어간 인쇄술은 르네상스 시대와 만나 꽃을 피우게 되는데, 다양한 지식과 인문주의적 사고를 대량의 책과 브로드사이드로 유럽 전역에 널리 퍼뜨리게 된다. 그리고 인쇄술의 발전과 함께 이루어진 타이포그래피 발전으로 다양한 타입 페이스와 꾸밈 장식들이 혼용되기 시작했다. 반면, 구텐베르크는 60의 나이의 쫓겨나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었고 빌린 돈에 대한 지불 능력을 상실한 상태였지만, 마인츠에서 호메리 박사의 재정 지원 덕분에 다시금 인쇄소를 세울 수 있었다. 또한 다행히 마인츠의 대주교 아돌프는 구텐베르크에게 귀족 지위인 궁정 신하에 임명하며, 말년에 그의 노력이 조금이라도 보상받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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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서적

<그래픽디자인의 역사> 필립B. 멕스, 미진사 
<중세는 정말 암흑기였나> 이경재, 살림

오매불망

취하여라 언제나 취해 있어야 한다.
모든 것은 거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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