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Features  /  Feature

저항과 반항의 예술, 그라피티와 거리미술

16.02.26 0

도시에서의 생활은 퍽퍽하다. 지하철의 북적임과 소음, 차가운 타인의 시선과 밤에 만개하는 쓰레기더미는 도시의 퍽퍽함을 증명한다. 그러나 도시는 흥미롭다. 도시에는 방치되고 관리되지 않는 장소가 존재하기 마련인데, 그저 빈틈으로 치부되기 일쑤인 공간에 새로운 활력과 생명을 불어넣는 작업이 종종 이뤄지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도심 속 낙서’라 불리는 거리미술이다.

출처: http://wide-wallpapers.net


거리미술은 초기 그라피티 미술운동과 그 맥락을 같이한다. 40여 년간 그 명맥을 이어 온 이 미술운동은 “거리는 위대한 문화실험실”이라는 전제로부터 시작됐다. 그리고 어느덧 거리미술은 도시의 풍경과 새로운 문화를 형성하는 중대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Banksy의 작품, 출처: http://www.artlyst.com


초기 그라피티는 제도적인 허가 없이 무작위로 행해졌다. 태생부터가 ‘불법적인’ 이 미술운동은 법적/제도적 관습과 규율에 대한 반감으로 시작됐다. 때문에 그라피티 라이팅은 제도적 제약과 긴장감 속에서 이뤄질 수밖에 없었고, 우리는 활자를 통해 그 긴박함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출처: http://blocs.xtec.cat/sagarrabarcelonaangles/


그라피티 라이팅 초기에는 알파벳의 변형처럼 관습적인 문자를 재구성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이는 곧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거나 또 다른 자아의 존재를 확인하고 주장하는 행위였다. 벽을 캔버스 삼아 행하는 이 운동은 미술과 디자인의 벽을 허물고 정통 미술사를 뛰어 넘는 하나의 예술이 됐다. 그리고 작가와 도시가 벽을 통해 대화한 흔적으로 남았다.

벽이라는 캔버스는 일종의 구속과 제한을 벗어난 영역이다. 때문에 거리 미술은 도시 전체를 놀이터로 삼아 노는 놀이이자 게임이 된다. 판독이 안 될 정도로 변형된 시그니처 그라피티(문자를 디자인 요소로 삼는 그라피티)는 타인을 이해시키려는 행위라기보다 자신의 개성과 자유를 표현하는 행위이다. 그리고 이러한 행위를 통해 독창적인 시각언어는 완성된다.

이화 벽화마을, 출처: http://thieunien.vn

 
거리미술은 그라피티라는 미술활동과 그 맥락을 같이 한다. 이들은 순전히 기능적인 도시의 시설을 표현의 도구로 삼아 대중들에게 의미를 모색하게 만든다. 또한, 거리미술은 일상의 평범한 장소를 낯설게 만들기도 한다. 그리고 지금 역시 우리의 일상적인 공간이 재탄생하는 활동이 전개되고 있다.

출처: http://www.stylebyasia.com

초기에는 하위문화의 한 형태로 비밀스럽게 이뤄졌던 예술행위가 후기에 이르러서는 대중들이 이해하기 쉬운 형태로 변형된다. 초기에는 해독하기 어려운 암호와 같던 활자가 더 이상 암호가 아닌 작가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하나의 캐릭터로 변모한 것이다.

Amazing 3D painting, 출처: http://iloboyou.com/street-art-illusions-by-julian-beever/


또한 소외된 공간에서 은밀히 진행되던 작업들이 이제는 도시의 중심부에 자리한 도로나차선에서 버젓이 행해지고 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자유로운 생각과 의견을 표현하기 위해 시민들을 위한 공공영역까지 파고들어 그 작업을 지속적으로 이어오고 있다.

출처: http://www.taringa.net

 

그라피티는 도시 주변을 캔버스로 삼는 거리미술이지만 본목적은 본래 사물이 갖는 의미를 환기시키는데 있다. 물신화된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뤄지는 기업들의 홍보 전략을 과감히 교란시키기도 하고, 정치노선에 대한 반감을 표출하기 위해 행해지기도 한다. 무엇보다 이들은 ‘빈틈’과 ‘주변’으로 방치되는 무관심한 공간에 새 생명을 불어넣는 행위라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도시의 생활은 퍽퍽하다. 그러나 그만큼 흥미롭다. 그라피티와 거리미술이 제도권이 갖는 모순과 비리를 위트 있게 폭로하기도 하고, 기존의 의미에 충실하던 도시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녀

삶은 생명을 얻어 죽어갑니다. 어쩌면 죽기 위해 태어나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람은 “아직”과 “이미”의 경계에 선 그 무엇이라서, 묻게 됩니다.
“내가 누구인지 알 수 없어요.”

0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