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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폴론의 신전을 통해 그려본 신(神)과 인간

16.03.03 0

아폴로 신전, 출처: http://happyolivehouse.com


고대 그리스 델포이 신전은 아폴론의 것이다. 신전 앞 현판에는 주지하듯 이렇게 쓰여 있다. ‘너 자신을 알라!’. 신탁이 이루어지는 이 공간은 기둥을 받치는 주추가 없는 기둥만이 우뚝 솟아있다. 기둥은 지상에서부터 시작하여 올라갈수록 얇아지는데 그 외양이 마치 남성의 성기를 닮았다. 대지에서 솟아나는 ‘남성의 성기’를 떠올리게 하는 도리스식 기둥은 마치 태양과 천구를 떠받치는 아폴론의 생명력을 묘사하는 듯하다.

신탁이 행해지는 이 곳, 델포이 신전의 현판은 특별하다. 천명(天命)은 하늘만 아시는 바, 신전은 감히 자신의 운명을 알고자하는 인간의 욕망을 꾸짖는 듯하다. 오늘은 ‘신’과 ‘인간’이라는 낡고 오랜 주제를 끄집어내 다양한 작품을 통해 인간의 정서를 확인해보려 한다.

 

신(神)앞의 인간

영화 <프리즈너스(Prisoners)> 출처: http://www.chicagonow.com


영화 <프리즈너스(Prisoners)>의 도입도 그러하다. 총부리를 겨눈 부자(父子)의 어깨 너머에는 한 마리의 사슴이 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시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며 나라에 임하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는 기도문과 함께 두 발의 총성이 울린다. 이윽고 사슴은 죽는다.

영화의 도입부가 예고하듯, 영화는 러닝 타임 내내 인간의 이중성을 폭로한다. 두 가족에게 들이닥친 비극을 그 시작으로 볼 수 있는데, 어린 딸들이 납치되고 유일하게 용의선상에 오른 남자의 지능은 범죄를 계획할 만큼 높지 않다. 딸의 납치 앞에 무능한 또 한 사람. 이성을 잃은 한 가정의 아버지가 있다. 그는 무능하고 저능하기까지 한 범인을 욕탕에 가두고 고문한다. 기어코 자백을 받아내야만 하는 아비는 독백한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고 다만 악으로부터 구하옵소서….’

이 같은 추악함을 신 앞에 두 손 모아 경건함으로 일소하는 것이 인간이라니. 이러한 인간의 잔악함에 경악했으나 한편, 딸을 잃고 방황하는 아비인 그를 죄인이라 손가락질 할 수 없는 심연에 울컥했다.

 

인간의 탁월함 : 아레테(arete, 德)

소크라테스로부터 시작되는 그리스의 지성사 안에는 인간에 대한 강렬한 믿음이 있다.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의 계보를 잇는 그리스 지성주의는 인간으로서 발휘할 수 있는 최고의 능력이 인간의 이성에 있다고 보았다. 이 이성의 기능이 최대한 발현되고 있는 상태가 ‘아레테(arete, 德)’다. 인간과 다른 여타의 존재들을 구별할 수 있는 인간만의 고유성, 그것은 오직 이성뿐이며, 플라톤에 이르러서는 인간의 이성은 이데아(idea)라는 천상의 빛과 같은 지위를 하사 받는다.


<Icarus and Daedalus(미궁에서 탈출한 다이달로스)> 그리스 인들은 자신이 가진 능력에 대한 믿음으로 하늘을 날고자 했다, 출처: http://www.ifobox.com


인간으로서 행복한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인간만의 고유한 이성을 최대한 발현하여 인간의 탁월함을 실현해야만 한다. 즉, 학자의 아레테는 자신의 학문을 최대한으로 발전시켜 초인의 경지에까지 이끌어 올리는 것이고, 운동선수의 아레테는 세계 기록을 깨거나 경기에서 우승을 하는 것이요, 음악가의 아레테는 최고의 기술과 예술성을 가지고 자신의 음악을 연주하는 것이다.

 


- 헬레네는 자신의 미모에 만족하지 않고, 우아함과 건강미, 지성미를 덧붙임으로써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에 버금가는 아레테를 얻었다, 출처: http://etiennemichael.blogspot.kr

동양에서의 아레테는 덕(德)을 지칭한다. 이는 자기에게 충족되어 바깥에 기댐이 없는 상태를 이른다. 이른바 부증불감(不增不減: 늘어난 것도 아니며 줄어든 것도 아님)의 경지, 그 덕(德)이 아레테이자 행복인 것이다.

 

Molon Labe! 와서 빼앗아 보라!

영화 <300> & <Prometheus> Peter Paul Rubens, 출처: http://www.jiggle.dehttps://en.wikipedia.org


고통을 겪은 인간만이 영웅이 된다. 신에 의해 영웅으로 점지된 인간은 누구도 그 과업을 피할 길이 없다. 이런 맥락에서 프로메테우스가 인상 깊다. 신에 대한 도전, 인간에 대한 사랑, 신념에 대한 강직함, 뜯기는 간과 더 없는 피로. 그는 코카서스 산 중에서 독수리에게 간을 뜯기는 형벌을 선고받은 피고이자 신의 불을 인간에게 훔쳐다 줬다는 신들의 얄팍한 희생양이다. 이것은 인간의 나약함에 편을 들어 도움을 내준 신으로서의 더없는 야박함을 반증한다. 헤라의 미움을 산 헤라클레스의 죽음이 가히 그러하다. 헤라의 미움과 아내의 오해, 독약 발린 그의 옷과 타들어가는 육신, 그리고 그의 외침이 처절함을 짐작하게 한다.


자, 고통이 다시 깨어나기 전에, 내 강인한 마음이여, 내 입에 무쇠 가시들이 난 재갈을 물려 비명을 억제하고 강요된 일을 흔쾌히 마치게 하여라!

-박경철, <문명의 배꼽, 그리스> 中

 

외침에 대한 저자의 부연처럼 이는 ‘신의 요구라면 이겨내고야 말겠다는 강한 의지, 인간의 한계를 알면서 그것을 넘고자하는 의지’의 집약이다. 이러한 외침은 마치 책의 후반부에 등장하는 스파르타 전사의 구호 “Molon Labe(네가 와서 빼앗아보라)!”처럼 들렸다.

신이 부과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짊어지는 것이 아니라, 나 스스로가 자처하여 짊어진 나의 숙명. 빼앗고, 빼앗고, 빼앗다 못해 인간으로서의 육신마저거두어가는 신 앞에 선 헤라클레스의 외침은 ‘Molon Labe! (와서 빼앗아 보라!)’다. 그러나 결국 헤라클레스가 영웅으로서 신의 반열에 오를 수 있음은 헤라의 허락이 없이는 안 될 일이다.

 

눈 먼 인간

 

영화 <프리즈너스(Prisoners)> 출처: https://www.yahoo.com/movies


영화 <프리즈너스(prisoners)>의 결말이다. 범인은 저능한 남자의 어머니였다. 아니,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저능한 남자는 어린 시절 여태껏 어머니라고 불렀던 여자에게 납치당해 살아난 생존자다. 이렇듯 인간은 가늠할 수 없는 세계에 내던져진다. 시작부터 눈이 먼 채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생의 어둠 가운데 적응하면 할수록 이와 동시에 그의 죽음이 육박한다. 이 가운데서 우리가 명시적으로 볼 수 있는 것은 바로 지금, 이 순간뿐이다. 이러한 비극으로 ‘운명’지어진 인간은 ‘자기 스스로 눈 먼 오이디푸스’의 그 ‘비극’과 맞닿아 있다.

어떠한 낭만도, 어떠한 자기위안도, 어떠한 실낱같은 희망도 없이 냉정하게 삶이란 그저 고통이고 비극이며 부조리다.

행복한 인간

삶의 이 비참함 가운데 그 스스로 자처하여 신 앞에 선 인간, 그는 무슨 연유로 그러한 것일까. 그 지독한 과업과 죽음까지 이겨내야 했던 헤라클레스도 헤라의 허락 없이 신의 반열에 오를 수 없었다. 신의 완전성 앞에 영웅조차도 무력한 인간, 그렇다면 인간으로서의 완전함이란 신에게 의탁하여야만 가능한 것일까.

 


<The memory of moon> 출처: http://notefolio.net/minsssssong

신의 완전함과 영원함에 비하자면 인간은 마치 한 철을 위해 목 놓아 우는 하루살이와 같다. 그러나 인간은 바로 그 한 철을 살아내기에 그들의 생애 중 청춘은 아름다운 한 떨기 꽃과 같고, 그들은 한 철만 살아낼 것을 알고 있기에 그렇게 목 놓아 울며 모든 것을 내던져보기도 한다. 신이 올림포스 너머에서 권태로이 인간을 내려다보고 있을 때, 인간은 생 앞에서 투쟁한다. 인간의 삶은 ‘비극’으로 ‘운명’ 지어졌으되 인간의 삶은 비극이 아니며, ‘구원’이다. 매 순간 ‘행복’이 벼려진다. 완전한 신, 그대는 알 수 없다.

인간은 자신에 대한 어떠한 자각과 예감도 없이 지상에 선다. 인간의 삶은 거저 주어지되 항상 비극이 도사리고, 지상에는 허기진 결핍이 상존한다. 그러나 그들은 찰나의 생애를 성실히 산다. 고대 그리스의 부와 명예는 빛을 바래 없어졌다. 그러나 기둥은 남아있다. 대지에서 올라온 이 남성의 성기는 어쩌면 신에 대한 조롱이자 모독이며 실은 인간의 생명력을 찬양하기 위한 형상일지도 모른다.

 

고란도 아폴로 신전, 출처: http://theologia.kr 


생(生)하면 멸하는 것이 삶이다. 신탁은 그저 신의 영원함 앞에서 투쟁하는 인간의 생에 대한 아레테(arete, 덕)을 확인하고자 하는 인간의 바람일 것이다.

그녀

삶은 생명을 얻어 죽어갑니다. 어쩌면 죽기 위해 태어나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람은 “아직”과 “이미”의 경계에 선 그 무엇이라서, 묻게 됩니다.
“내가 누구인지 알 수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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