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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지적 작가 시점] 해보고 난 후에야 깨달은 외로움에 관하여, 황정호

16.06.02 1

<전지적 작가 시점>은 노트폴리오에 작품을 게재하는 작가를 선정해 그의 작품을 인터뷰하는 자리입니다. 그동안 작가가 어떤 의도로 이런 그림이 그렸는지, 무슨 생각으로 이런 표현을 했는지 궁금하셨죠? 앞으로 진행되는 <전지적 작가 시점>을 통해 작가보다 작품 중심의 이야기를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황정호 

#01. Beginners

Beginners2
“영국이랑 한국이랑 9시간 차이가 나요. 아직 오늘이네요.”
“내 생에 가장 긴 하루예요”
가진 돈을 모두 털어 한 달 동안 유럽여행을 다녀왔다.
내 생에 가장 긴 여행을 영국에서 시작했다.

 

<Beginners>는 어떤 감상에서 시작된 작업인가.

이 그림은 유럽여행 동안 그린 첫 번째 그림이에요. 여행의 첫 시작이자 제 인생에서 큰 변화를 시작한 순간, 저를 둘러싼 공기와 분위기를 그리고 싶었어요. <Beginners> 라는 제목은 제가 참으로 좋아하는 작가 레이먼드 카버(Raymond Carver)의 소설 제목에서 따왔습니다. <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들>이라는 단편소설의 오리지널 버전의 제목이지요. 소설에, “우리는 사랑을 하는 데 있어서 모두 풋내기들(Beginners)이야” 라는 구절이 나와요. 소설을 읽으며 비단 사랑뿐만 아니라 여행에도, 인생에도 우린 모두 풋내기들 이라는 생각을 자주 하곤 해요. 소설처럼 삐걱대는 사랑을 하고 삶을 살아가며, 그것이 어떻게 작동하고 구성되어 있는지를 하나씩 알아가는 저희의 모습은 모두 풋내기의 모습 아닐까요?

 

‘내 생에 가장 긴 하루였다’던 캡션이 인상 깊다. 작품의 배경이 된 하루가 33시간이었던 셈인데 하루에 두 번의 낮 혹은 두 번의 밤을 맞이한 소감은 어땠나.

여행의 첫 출발지가 런던이었어요. 오랜 시간 비행을 하고 런던에 도착했을 때, 앞으로의 여행에 대해서 생각했어요. 특별한 계획 없이 무작정 시작한 여행이었거든요. 그러다 문득 시차 때문에 아직 하루가 채 지나지 않았다는 생각이 떠오르면서 ‘아, 오늘이 내 생에 가장 긴 하루구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많은 것들이 처음일 때, 유독 하루가 길죠. 처음 사랑을 할 때, 사랑하는 사람 눈을 쳐다볼 때, 처음 여행을 할 때도 그렇고요. 비록 시차 때문에 하루가 길어졌지만 계속해서 제 하루가 길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고백



황정호의 작업은 단정하고 선이 정갈한 느낌이다. 작업 시, 황정호만의 작업스타일을 살리기 위해 특별히 주의를 기울이는 부분이 있다면.

본래 성격이 명료하고 깔끔한 것을 좋아해요. 그러다 보니 그림에도 자연스레 느낌이 스며든 것 같아요. 그림체는 영미권 코믹스트립 류의 선이 명료한 스타일을 좋아해서 크리스 웨어(Chris ware)와 에이드리언 토미네 (Adrian Tomine), 찰스 번즈(Charles Burns)와 같은 작가의 작품을 많이 습작했어요. 최근에는 계속해서 새로운 시도를 해보고 있는 중이랍니다.

 

어쩌면 지극히 개인적인 내용을 소재로 작업하고 있다. 이러한 작업의 장/단점은 무엇 인가.

제 작업은 저의 개인적인 이야기를 ‘숨기는 일’과 ‘드러내는 일’의 완력다툼 같아요. 저는 제 감정을 직접적으로 이야기하는 일이 부담스럽고 부끄러워요. 그래서 그림 속에 감정을 숨겨놓죠. 하지만 저도 삐걱대는 인간인지라 때로는 그림 속에 감정이 직접적으로 드러나기도 하고, 그게 누군가에게 전혀 다른 의미로 해석되기도 해요. 이런 작업의 장점은 누군가 제 진심을 알아주고 나아가 그 진심을 숨기려는 부끄러운 마음까지 알아챘을 때 고마움을 느끼는 일이에요. 단점이라 하면, 역시나 제 그림이 다른 누군가에게 잘못 이해될 가능성이 있다는 거죠. 워낙 개인적인 일을 작업의 소재로 삼다 보니 저에 대한 잠정적 판단을 하기가 쉬운데 저는 그들의 판단이 어떤지 좀처럼 알기가 쉽지 않으니까요.



#02. It just started raining



색채 표현에서 전반적으로 채도가 낮은 푸른 빛의 색상을 사용하고 있다. 다소 어둡고 차가운 느낌을 줄법한데도 따스한 느낌을 연출하는 게 신기하다.

개인적으로 무게감 있고 차분한 느낌의 색을 좋아해요. 그래서 평소에 제가 좋아하는 색을 잔뜩 템플릿에 추가해놓고 색칠 작업을 할 때 사용해요. 그래도 최근에는 조금씩 밝고 채도 높은 색을 쓰려고 노력 중이에요. 아무래도 쓸쓸한 느낌이 많이 있다 보니 이런 그림으로 돈을 벌기가 힘든 것 같아서요.

 

색채 선정과도 관련된 질문일 수 있지만, 작업의 배경이 되는 시간이 낮보다 주로 밤시간이다.

주로 제가 움직이는 시간이 밤이라서 그런 것 같아요. 사람이 많은 것이 불편해서 낮에 잘 돌아다니지 않거든요. 혼자 지낸 지 꽤 오래 돼서 그런 생활이 익숙해요. 다만 최근 떠났던 여행에서 정말이지 오랜만에 아침부터 밤까지 밖에 있었던 것 같아요. 문득 ‘하늘색이 변하는 걸 본지 정말 오래 됐구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26년만의 잠에서 깨어난 기분이었어요. 당시 런던에서 만난 한 여자분의 초록색 머리가 해질 녘의 하늘과 잘 어울렸고, 햇빛이 비치는 브뤼헤 호수도 정말 멋있었어요. 낮도 밤만큼 아름답다는 걸 알았으니, 살아가는 게 두 배 더 좋아지겠죠?

 

"머리 색이 정말 예뻐요"

"지금 하늘이랑 어울려서 다행이에요" 

런던 캠든 마켓을 걷다가, 머리색이 정말 아름다운 여자분을 보았다.
이 아름다운 순간이 순식간에 붕괴되고 멸망할지라도, 
나도 내 인생에서 잠시나마 반짝였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했다.



<It just started raining> 속 남자의 뒷모습이 왠지 모르게 슬퍼 보인다. 배경이 된 장소는 어디이고 남자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나.

장소는 친구네 집 부엌이고 앉아있는 사람은 저예요. 때는 2015년 11월 14일이었고, 광화문에서 집회가 있던 날이었죠. 그 날, 갑자기 비가 내렸고 시민 한 분이 물 대포에 맞아 쓰러졌어요. 그때의 저는 ‘지금 당장 먹고 살아야 한다’는 핑계로 일을 하고 있었어요. 딱히 그 날, 그 일을 하지 않았다고 해서 큰일이 나는 것도 아니었는데 관성처럼 일을 했죠. 문득, 뉴스에서 슬픈 소식이 계속해서 들리는데도 제 자리에 가만히 앉아있는 제 자신이 정말 부끄럽고 무기력하게 느껴졌어요. 그림은 그때의 감정을 담아 작업했어요. 전 항상 제 자신을 무기력하다고 생각해왔는데 그래서인지 이 그림이 저 자신을 대표하는 그림처럼 느껴져요.

 


#03. 지옥고(지하, 옥탑, 고시원)의 청춘

            

일을 하고 집으로 돌아오면 고지서가 와있다.
세상에, 나는 뭐이리도 탐욕스러웠나, 새삼 놀란다.
내가 뭘 그리 욕심을 부렸을까. 난 전혀 그러지 않았는데.
아무래도 난 조용하게 욕심이 가득한 사람인가보다.

빨래를 널기 위해 건조대를 설치하면,
내 몸을 누일 자리는 고작 간이침대 하나의 공간 뿐이다.
누군가와 함께 누우려면 아무래도 옷을 말리지 말아야 하나 싶다.

가끔씩 어깨에 내리는 햇빛이 무겁다.

 

유난히 어질러진 집안을 배경으로 한 작업이 많다. 이런저런 물건으로 어질러져 있어 솔직한 인간미가 느껴지는데, 특별히 이 소재를 선호하는 이유가 있나.

저는 군대에서 그림을 처음 배우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어느 날, 동생이 제 그림을 보더니 불안해 보인다고 하더라고요. 그러면서 ‘중력이 없는 것 같다’는 말을 했어요. 개인적으로 제 삶이 부유하다는 생각을 많이 했던 지라 그 말이 참 와 닿더라고요. 그래서 그 후로 그림을 그릴 때 바닥을 무겁게 하려고’ 했어요.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제가 좋아하는 음반이나 책으로 바닥을 어질러놓게 되더라고요. 그런데 실제로도 청소를 귀찮아해서 사실적인 그림이 됐어요.

 

나의 삶

 

고장난 전등

 

 

<지옥고(지하, 옥탑, 고시원)의 청춘>이라는 제목은 똑같은 구도와 소재를 다룬 <나의 삶>, <밤>, <고장난 전등>과는 다른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 같다. 세 작업의 공통점과 차이점은 무엇인가.

<나의 삶>, <밤>, <고장난 전등>은 제가 느끼는 외로움을 그렸어요. <고장난 전등>은 실제로 갑자기 전등이 퍽! 하고 터진 적이 있었어요. 그때 불현듯 제가 영원히 혼자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 짧은 찰나에 왜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는 모르겠어요. 그 전까지는 제가 외로움을 타지 않는 인간이라고 생각했는데, 실은 제 안의 외로움과 예비된 고독을 짐작하며 살아왔던가 봐요.

<지옥고의 청춘>은 새벽에 맥도날드 햄버거를 사들 고 집으로 돌아와 각종 고지서를 마주했을 때의 무서움을 그렸어요. 저는 주유소, 당구장, 카페, 서류정리, 박스포장 등 정말 많은 아르바이트를 해봤어요. 하지만 그 모든 일이 정말 ‘말 그대로’ 월세를 내고, 한 달을 먹고 살면 남는 돈이 거의 없더라고요. 그래서 고지서가 정말 무서웠어요. 가스비, 전기세, 월세 등등. 전 딱히 욕심을 부린 기억이 없는데 영수증과 고지서는 절 탐욕스러운 인간으로 만들고 있더라고요. 단순한 종이 몇 장이었지만, 그게 그렇게 무겁고 무서웠어요.

 

<지옥고의 청춘>이나  <나의 삶>에는 작가 본인의 일상이 녹아있기도 하지만, 그 안에 사회에 대한 시선과 의견이 담겨있다. 평소에도 우리 사회에 일어나는 일에 주의를 기울이는 편 인가.

부끄러운 일이지만, 주의를 기울이기 시작한 지 별로 되지 않았어요. 2014년 4월 중순 즈음부터 관심을 갖게 되었으니까요. 그마저도 먹고 사는 게 힘들다는 핑계로 적극적인 활동보다 그저 관심만 가지고 있죠. 앞서 <It just started raining>작업에서도 말씀 드렸듯, 저는 대단히 무기력한 사람이에요. 용기가 없는 겁쟁이라서 그 점이 무척이나 부끄러워요. 하지만 이제부터는 달라지려 해요. 여행도 다녀왔고, 나쁜 일도 저질러 봤으니 적극적이기가 조금은 더 편하지 않을까,는 생각이에요.

 

 

See you Stranger 

한여름밤의 마술 

 

황정호의 작품을 보면, 외로워 보여 안아주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유독 ‘외로움’의 감정을 다루는, 혹은 ‘외로움’이 느껴지는 이유가 무엇일까.

저는 제가 외로움을 잘 타지 않는다고 생각했어요. 혼자 있는 것이 좋고, 집에 틀어박혀 많은 시간을 보냈지만 딱히 심심하거나 외롭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거든요. 어려서부터 먹고 싶은 것을 참고, 갖고 싶었던 것을 외면하며 살아서 무언가를 참고 기다리는 것도 익숙한 편이에요. 사랑 역시 마찬가지예요. 한 번은 쏟아지는 눈을 피하려고 신촌의 서점 지붕아래서 눈이 그치길 기다린 적이 있었는데, 옆에서 같이 기다리던 분이 정말 매력적이었어요. 그런데 그 사람에게 말을 걸지도, 전화번호를 물어보지도 않았고 그게 특별히 슬프지도 않았어요. 그때 문득 ‘아, 내게 주어진 사랑의 몫은 딱 이 정도구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나는 이 정도의 사랑으로 만족하며 사는 사람이구나’하고요. 그때까지 사랑이 사치처럼 느껴졌고 그 정도로도 만족할 수 있었으니까요.

그러다 불현듯 작년 여름 밤을 시작으로 갖고 싶은 것을 갖고 사랑도 해봤어요. 그제서야 외로움이 느껴지더라고요. 갖고 싶은 것을 가지고 처음 사랑을 해보고 난 후에야 외로움을 알았다니 참 웃기죠. 어쩌면 제 만성적인 무기력은 그동안 ‘유보한 행복’에 있던 건 아닐까는 생각이 들어요. 지금은 짝사랑을 하고 여행을 위해 전 재산을 쏟아 붓느라 제 자신이 많이 망가진 상태예요. 하지만 망가진 지금이 더 좋아요. 망가지고 상처받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들이 삶에는 분명히 있거든요. 삶이 그렇게 구성되어 있다는 게 잔인하고 웃기죠.

 

앞으로 작업을 통해 사람들에게 전달하고 싶은 ‘마음’은 무엇인가.

아무래도 외롭고 상처받은 ‘괜찮지 않은’ 그림을 모두가 좋아하기 힘들 거예요. 저 역시 점점 줄어드는 일을 보며 절실히 느낍니다! 하하. 그래서 이제부턴 밝은 그림을 그려보려고 해요. 제 그림이 누군가에게 실질적인 도움이 되지는 못해도 비슷한 아픔을 공감하며 위로가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다만 우리는 괜찮지 않은 세상을 살아가고 있어요. 그래서 저처럼 습관적으로 괜찮다고 말하며 웃는 사람들에게 그림을 보는 잠시나마 ‘괜찮지 않아도 된다’고 전하고 싶어요.

 


황정호  

http://notefolio.net/jeonghohw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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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인

읽는 사람이 즐거운,
언제나 유쾌한 글을 쓰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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