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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의 세계’에 대한 열망, 초현실주의(surrealism)

17.01.20 0

<Being John Malkovich> 출처: http://www.enterate.mx

 

우리는 종종 영화나 소설, 미술 작품을 통해 다양한 형태의 ‘꿈’을 접한다. 시공간을 초월한 곳에서 발생하는 무한한 자유와 꿈을 자각한 이가 꿈속으로 더 깊이 들어가려는 시도는 꿈이기 때문에 아무리 비정상적인 일이라도 허락된다. 오히려 현실과는 색다른 이야기가 관람객들에게 신선한 구성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때문에 ‘꿈의 세계’를 지향하는 초현실주의(Surrealism)를 주제로 한 문학·예술 작품이 많다. 꿈과 현실을 넘나드는 영화, 몽환적인 느낌을 주는 사진, 자각몽(Lucid dreaming)을 주제로 한 음악이 대표적인 사례다. 이렇듯 꿈은 형태만 다를 뿐, 익숙한 소재로 예술의 한 분야로 사용되어왔다. 그만큼 우리는 현실적으로 접할 수 없는 영역에 대한 끌림으로 꿈을 소비하며 궁금해 한다. 그럼에도 꿈의 세계는 여전히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꿈을 소재로 한 영화 <Being John Malkovich> 1999, 출처: 네이버 영화 

 

특히, 꿈을 소재로 한 영화는 시공간이 뒤틀리거나 주인공이 초인적인 힘을 발휘함으로써 현실에서 이룰 수 없던 열망을 이루는 장면이 곧잘 등장한다. 또한, 대체로 현실에서 일어나기 힘든 일이나 이성적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기이한 장면을 반복해서 표현하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 또한 매일 꿈을 꾼다는 점에서 이러한 연출이 현실과 아주 관련이 없다고 단언할 수는 없다. 기억이 오래가지 못할 뿐, 마주하는 일상만큼이나 우리는 자주 꿈을 꾸고, 의식의 기저에 도달해 ‘꿈의 시간’을 보낸다. 다만 깨어나는 순간부터 꿈의 잔상이 ‘뇌의 착각’으로 남아 자연스레 잊혀질 뿐이다.

잠깐 눈을 붙이는 사이에도 꿈은 전개가 빨라 그 형상을 기억할 수 없을 때가 많다. 하지만 화면에 정지한 채 구현되는 꿈도 있다. 바로 초현실주의 미술 작품이다. 비(非)가시적인 꿈이 작가를 통해 캔버스 안에 재해석되는 순간, 우리는 기억의 저편에서 희미하게 존재하던 꿈을 천천히 관찰할 수 있다.

 

#캔버스 속 작은 꿈의 세계


초현실주의 화가들은 이성적으로는 해석이 불가능한 꿈의 세계를 ‘초현실주의’라는 이름으로 표현하고자 했다. 대표적으로 프랑스 시인 앙드레 브르통(Andre Breton)은 1924년 ‘초현실주의 선언’을 통해 아방가르드 그룹의 새로운 질서를 예견했다. 이는 기존의 예술과 문학의 질서를 파괴하는, 즉 ‘현실 부정’이라는 큰 틀에서 초현실주의의 잔뼈를 구성하는 시도였다.

 

<기억의 지속(The Persistence of Memory)> 살바도르 달리(Salvador Dali), 출처: https://www.wikiart.org

 

초현실주의의 기원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로부터 시작된다. 당대 예술가들은 혼란스러웠던 시대상에 인간이 이뤄낸 모든 것에 회의감을 느꼈다. 때문에 점차 이성(理性)에 대해 불신을 갖기 시작했는데, 이들의 작품 역시 당시 풍조에 영향을 받아 전위적인 성격을 띨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흐름은 살바도르 달리(Salvador Dali), 르네 마그리트(René Magritte) 등의 대표적인 초현실주의 화가에게까지 미쳤다. 그들에게도 현실은 탈피하고 싶은, 극복해야 할 대상이었다. 때문에 현실은 부정적인 의미를 지닐 수밖에 없었고 꿈은 현실을 도피하는 수단인 동시에 욕망의 발현이었다. 꿈을 통해 고통에서 벗어나고자했다는 점에서 이들의 작품은 해방의 성격을 지니며 당대의 시대정신과 복잡하게 얽혀있다. 때문에 이들의 그림을 보고 단순히 ‘몽환적’이고 ‘아름답다’고 하는 것은 표면적인 해석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번 칼럼에서는 일종의 ‘혁명운동’과도 같았던 미술사적 맥락은 잠시 뒤로한 채 그림 속 장면에 주목하여 작품에 대해 이야기 해보고자 한다.

 

#완전하지 못한 세계

일반적으로 꿈은 ‘환상적’이며 ‘화려한 세계’를 연상하게 한다. 또한, 꿈은 기억 저변에 숨겨둔 두려움 내지 트라우마가 존재하는 심연에 도달할 수 있게 한다.

 

<붉은 탑>, 조르조 데 기리코(Georgio de chirico),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조르조 데 기리코(1888)는 위의 작품 <붉은 탑>에서 이탈리아 건축물을 배경으로 텅 빈 광장을 표현했다. 사람 한 명 등장하지 않는 외로운 풍경, 그림자가 넓게 드리운 음침한 세계, 화면의 반 이상을 차지하는 어두움, 건물만이 우뚝 서 있는 공간 등, 기리코의 작품은 실제 존재하는 공간을 모티브로 삼아 꿈의 세계를 재현했다. 광장에는 발자국 소리하나 들리지 않을 것 같이 스산한 기운이 돈다. 그렇다고 그림에 어떤 괴물이나 귀신이 등장해 공포심을 자극하고 두려움을 조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저 현실에서 일어날 수 없는, 꿈이 아니고서는 납득할 수 없는, 불가사의한 장면을 그리는 것만으로 두려움의 감정을 건드린다. 특히 한 톤 가라앉은 색감과 극명한 명암 대비는 마치 세상에 어두움과 밝음만이 있다고 말하는 듯하다.

 

<환각을 유발하는 기마투우사(Hallucinogenic Toreador)>, 살바도르 달리(Salvador Dali), 
출처: http://en.wikipedia.org

 

기리코가 꿈을 ‘소리 없는 공간’으로 해석했다면, 꿈을 ‘시끄럽고 혼란스러운 공간’으로 해석한 화가도 있다. 바로, 살바도르 달리의 작품 <환각을 유발하는 기마투우사(Hallucinogenic Toreador)>이다. 그림은 꿈을 더욱 비현실적으로 표현해 복잡다단한 생각의 연결 고리를 파편적으로 나타냈다. 기억의 조각으로 얼룩진, 연계성 없는 꿈의 세계를 적나라하게 나타낸 것이다. 화폭에 던져진 질서 없는 이미지는 동일한 형상이 연속적으로 이어짐으로써 금방이라도 꿈속으로 빨려 들어갈 것 같다.

 

#무너지는 현실과의 구획

야첵 예르카(Jacek Yerka, 1952~)는 폴란드 태생의 초현실주의 작가이자 현대 미술 작가로 활동 중이다. 그의 작품은 대체로 화려한데, 밝은 색채로 꿈을 환상적으로 표현한다.
출처: http://www.yerkaland.comhttp://www.designsmix.com

사실, 꿈의 세계가 미술 작품에서 드러나기 시작한 건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단순히 현실 세계를 재현(representation)하고 모방하는 것에 그쳤던 미술은 르네상스 시대를 기점으로 400년 동안 이어지다 막을 내린다. 때문에 ‘재현’으로서의 회화는 더 이상 의미가 없어졌고, 20세기에 이르면서 사실적인 묘사에 대한 압박도, 그럴 필요성도 없어졌다. 그리고 여전히 초현실적인 작품은 계속되고 있다. 다만, 현대의 초현실주의 작가들은 근대의 회화적인 방식과는 달리 기술적인 방법을 동원해서 또 다른 세계를 구현하기도 한다.

 

Jacek Yerka의 작품, 출처: http://www.imagnet.com

 

관람자는 초현실주의 작품을 보고 의문을 가질 필요가 없다. 애초에 초현실주의 작품에 사실적으로 접근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꿈은 원래 비정상적이어야 한다.) 오히려 이성적으로는 설명되지 않거나 무의식중에 감지되는 형상들을 캐치해 화면을 구성할수록 ‘꿈답다’고 말할 수 있다.

 

에릭 요한슨(Erik Johansson)은 현실과 비현실을 넘나드는 독특한 방식으로 작업한다. 차도를 들어 올려 천조각처럼 끌고 간다던지, 물고기 위에 섬나라를 병합하거나 하늘과 바다의 경계가 사라지는 등의 신선한 장면을 포토샵이라는 기술을 동원해 사실적으로 보이게 한다. 출처: http://62tae.blog.me/

 

에릭의 작품은 그림이 아닌 사진, 게다가 고화질의 사진에 정교한 합성의 기술을 더해 ‘착시현상’을 일으킨다. 이러한 장치는 신선함과 유희를 표현하지만 창작에 필수적인 ‘발상’, 아이디어, 창의성, 기술력 등을 동원했다는 점에서 결코 가볍지 않다.

 

출처: Erik Johansso 


어째서 우리는 꿈을 궁금해 하며 상상하고 시각적으로 나타내고자 하는 걸까. 단순히 골치 아픈 일상에서 벗어나고 싶기 때문일까, 아니면 눈을 뜨면 사라지는 꿈의 세계를 좀 더 기억하고 싶은 바람에서일까? 방법과 형식에 변화가 생겼을 뿐, 우리는 늘 꿈의 세계에 대한 열망과 호기심이 있었다. 이는 흔히 볼 수 있는 일상을 떠나 새로운 환경에 놓이기를 원하는 습성 때문일지도 모른다. 생각해보면 신선함을 추구하고 재미난 요소를 찾기엔 꿈만큼 적합한 소재도 없지 않은가! 또한, 꿈에는 정답이 없기에 그 누구의 제재 없이 무한상상을 펼칠 수 있다.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 <정신분석 입문>

 

꿈에 대한 해석은 프로이트의 1900년대 저서 <꿈의 해석> 이후 <히스테리 연구>, <정신분석 입문>, <자아와 이드>에서 구체적인 연구를 바탕으로 다뤄져 왔다. 이로써 정신분석학에 대한 이론에 근거해 꿈은 어느 정도 해석되는 단계에 이르렀지만, 아직도 명쾌하게 다가오지 않는 건 꿈을 신비의 영역으로 남겨두고 싶은 바람일지도 모른다.

이윤정(Lottie)

그림을 쓰고 글을 그린다.
아날로그를 사랑하다 디지털 시대의 위협을 받고 현대적인 것과 친해지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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