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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 살리기, 책 수선가

22.01.19 0

<너의 모든 것> 시즌3, 출처: 넷플릭스

 

사이코의 사랑 방식을 다룬 미국 드라마 <너의 모든 것>에 등장하는 주인공 ‘조’는 사랑하는 여자가 생길 때마다 파국에 치닿는다. 마음에 드는 여성이 생기면 그녀의 SNS을 찾아 일거수일투족을 파악하고 그녀가 어울리는 사람들과 현재 상황, 직업 등에 대해 미친 듯이 추론하고 유추한다. 문제는 이러한 방식이 꽤나 여자들에게 먹힌다는 점인데, 조의 사랑이 너무 과해질 때면 그녀를 둘러싼 주변인들에게 우호적인 방식이 아닌 ‘제거’에 초점을 두고 하나 둘씩 없애버린다. 문제는 그 방식이 살인이라는 점이지만.

 

<너의 모든 것> 시즌2, 출처: 넷플릭스

가정 폭력 아래 자란 조는 제대로 된 배움 없이 불우하게 자라지만, 자신에게 양아버지 같은 존재를 만나 책과 가까워진다. 그래서 각종 고전과 다양한 책을 섭렵하고 이러한 그의 배경이 여성들에게 셀링 포인트가 된다. 감수성이 풍부하고 철학을 논할 수 있는, (겉보기에) 공감력이 큰 남자가 된 것이다. 책을 사랑한 이 남자의 직업은 책 수선가. 그래서 시즌1, 2에서는 서점 직원을, 시즌3에서는 도서관 사서가 되어 주변 사람들의 책을 뜯어 고치며 살인을 이어간다. 그리고 정적이며 지적인 ‘도서관 사서’와 잔인한 범죄를 저지르는 ‘살인자’라는 양극단의 설정이 그를 더 임팩트 있는 캐릭터로 만들었다.

 

조가 책을 보관하는 곳, 출처: 넷플릭스

 

생각지도 못한 주인공의 직업에 놀라는 것도 잠시, 그간의 조의 작업들을 살펴보면, 아주 얇은 책장을 핀셋으로 집거나 망치를 이용해 책의 커버를 수선하기도 한다. 때로는 화학물질을 사용해 손을 보는 것 같다. 드라마 속에서 조는 훌륭한 책을 보존하기 위해서는 ‘적절한 온도와 습도가 중요하다’고 몇 번이나 강조하는데, 그래서 그는 책 보존을 위한 최상의 컨디션을 연출하는 전용 공간을 만들었다. (문제는 살인을 하는데 피해자들을 가두는 감옥으로 활용 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책 수선가’가 주는 지적인 이미지 덕분인지, 도서관 사서로 일하는 직장 선배가 아끼는 고전을 몰래 손 봐 은밀히 그녀의 환심을 사기도 한다. 물론, 조는 ‘책 수선’을 구애활동의 일환으로 활용하는 것 외에도 진심으로 자신이 사랑하고 아끼는 책을 찾아 원래의 상태로 되돌리기도 한다. 

 

재영 책수선, 출처: 재영 책수선 트위터

 

그리고 평범한 디자이너로 살다 책을 복원하는 작업에 푹 빠져 수선가가 된 사람도 있다. 바로 책 수선가 배재영씨다. 그녀는 미국에서 북 아트(book art)와 제지(paper making)을 전공하고 한국에 돌아와 2018년부터 책 수선가로 활동하고 있다. 그녀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출판’과 ‘책 수선’은 비슷한 범주에 드는 일이지만, 엄연히 다른 활동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먼저 책 수선가의 작업에는 책과 관련한 의뢰인들의 사연이 녹아있다. 사랑하는 아내를 위해 앨범을 복원하는 남편의 이야기, 오래된 성경을 후손에게 물려주려는 할머니, 어린 시절 국어사전을 펼쳐보며 시간을 보냈던 성인이 된 어린이 등이 있다. 특히 그녀가 책 수선점을 오픈하고 처음 의뢰를 받았다는 1980년대에 출판한 <국어대사전>은 특히나 지나간 유년 시절을 돌이켜 보게 한다.

 

 

의뢰인은 어렸을 적, 부족한 놀거리를 대신해서 이 책을 자주 펼쳐보았다. 중간중간 들어가 있는 삽화들을 보거나 단어들의 뜻을 찾아 읽으면서 시간을 많이 보냈다고 한다. p20. 살아남는 책 <어느 책 수선가의 기록>

 

누구나 한번쯤 책에 관한 추억이 있을 것이다. 마치 애착인형처럼 늘 들고 다니던 동화책이나 다정한 목소리로 그 책을 읽어주던 엄마, 책을 유난히 좋아하는 아빠 등의 모습이 그렇다. 이러한 맥락에서 그녀가 수선한 책들의 이야기를 담은 저서 <어느 책 수선가의 기록>은 단순히 책을 고치는 것 이상의 사람 냄새나는 이야기를 담았다. 특히 미니멀리즘이 유행처럼 퍼지고 디지털 사회가 심화되는 요즘 ‘책’과 ‘오래된 책’이 주는 감성은 그 어떤 콘텐츠가 줄 수 없는 그만의 매력이 있다. 그래서 그의 책과 글은 따스하다.

 

무너져가는 책의 시간을 멈추는 어느 책 수선가의 기록, 출처: 땡스북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는 나태주의 <풀꽃>과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는 김춘수의 <꽃>처럼, 이 세상에 수없는 책에서 누군가를 만나 특별한 의미를 지녔을 책들의 과거와 미래를 응원한다. 그리고 과거와 추억을 되살려 삶의 의미를 더하는 책 수선가 역시 앞으로 더 많은 이들의 추억을 부를 수 있길 바란다.

 

어느 책 수선가의 기록, 위즈덤하우스, 출처: 땡스북스


현재 동네서점 <땡스북스>에서는 <무너져가는 책의 시간을 멈추는 어느 책 수선가의 기록>展을 진행하고 있다. 


<무너져가는 책의 시간을 멈추는 어느 책 수선가의 기록>

전시기간 2022년 1월 5일 - 2022년 2월 8일 
운영시간 PM 12:00 - PM 09:00
장소 땡스북스 (서울시 마포구 양화로 6길 57-6)
문의 땡스북스

김해인

읽는 사람이 즐거운,
언제나 유쾌한 글을 쓰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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