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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 ART ROAD] 그리며 하는 세계일주 : 파란만장 중동스토리

14.05.09 1


Middle East


나의 중동여행은 2012년 7월 17일에 이집트에 도착한 것을 시작으로,
이집트, 이스라엘, 요르단 그리고 다시 이집트, 터키까지 총 한달 반간의 여정이었다.

 

[ Egypt ]

 

No.177
Face Of sphinx, Egypt




‘내 배낭은 어디에’
- Cairo, Egypt


‘에티오피아! 진짜 마지막 순간까지 나를 괴롭히는구나.’

에티오피아에서 도망치 듯 나왔다.

카이로 공항에 도착했다. 입국수속을 밟고 마지막으로 내 짐을 찾기 위해 컨베이어벨트 앞에 섰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파란색 레인커버의 내 배낭이 나타나지를 않는다. 내 배낭이 거의 마지막으로 나오려나 보다 생각하며 한 참을 서 있었다. 사람들은 하나 둘씩 자기 짐을 찾아 나가고, 빙빙 돌아가는 벨트 위, 내 배낭은 끝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에티오피아! 진짜 마지막 순간까지 나를 괴롭히는구나.’


사라진 메인 배낭에는 여행 할 때 필요한 물품들을 말고도 나를 가장 심난하게 만들었던 것은 그 가방에 고이 넣어 둔 내 그림들이었다. 다른 것들은 다 잃어버리더라도 그림만은 절대 잃어버리면 안 되는 소중한 것이었다. 당장이라도 내 배낭을 찾아내라고 바닥에 누워 깽판을 치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참고 참았다. 그리고 나 말고도 짐이 없어진 심난한 손님들이 몇 명 더 있었다. 당시 내가 기내에 들고 탔던 가방은 앞으로 메는 중간사이즈의 보조가방이었는데, 그 안에는 들어있던 것은 넷북, 카메라, 공책 몇 권과 지갑이 다였다.

없어진 짐 번호와 사무실 번호가 적힌 종이 쪼가리를 손에 쥐고 공항 의자에 앉아 눈물을 훔쳤다. 아니 그냥 눈물을 뚝뚝 흘리며 울었다. 억울함과 서러움으로 가득한 눈물이었다. 에티오피아에서 받은 마음의 상처가 아직 아물지도 않은 상태에서 이런 식으로 그 위에 소금을 뿌리다니. 그 상처가 너무 아파 미칠 지경이었다.

하지만 공항에 계속 앉아 있어봤자 해결 될 일은 아니었기에, 공항에서 나와 카이로 시내로 이동해 숙소를 잡았다.

방 값을 지불하면서 숙소 직원에게 나에게 겹친 불운에 대해 털어놓았다. 누군가에게라도 말하지 않으면 홧병이 날 지경이었다. 직원은 진심으로 걱정해 주면서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말하라고 했다.

“넷북을 충전해야 하는데 충전기가 없어서요. 혹시 같은 브랜드의 넷북을 가지고 있는 손님이 있다면 빌리고 싶은데, 손님들에게 물어보면 될까요?”
“아냐, 내가 손님들한테 물어봐줄게.”
“고마워요.”

몇 분 후, 누군가 내 방문에 노크를 한다. 중국인 여자가 넷북 충전기를 들고 서있었다.

“안녕하세요. 당신 얘기를 직원한테 들었어요. 짐은 꼭 찾을 수 있을 거예요. 이걸로 충전해요. 제 방은 화장실에서 두 번째니까, 다른 필요한 거 있으면 언제든지 찾아와요.”

정말 감사하게도 숙소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나를 걱정해 주었다. 지구촌이란 게 이런 걸까. 7월의 이집트는 그야말로 찜통이라 여벌의 옷이 꼭 필요했는데, 수재민 돕기에 나선 사람들처럼 다들 조금씩 도움을 주기 시작했다.

 

No.179
Pyramids, Egypt

사건 3일 째, 공항 직원이 공항에 와서 직접 짐 보관 창고를 찾아보라고 한다.

공항에서 직원을 따라 짐 보관 창고에 도착했다. 창고 문이 열리고, 직원은 들어가서 짐을 찾아보라고 한다. 나는 냉큼 창고에 들어가 눈에 불을 켜고 커다란 창고에 차곡차곡 쌓여있는 짐들을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창고에는 수많은 주인 잃은 짐들이 쌓여있었다.

‘에이 설마 이 수많은 짐 중에 내 배낭 하나가 없을까.’

하지만 점점 확인한 짐들이 많아지고, 확인 할 짐들의 양이 줄어들면서 나는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지막 남은 짐이 내 짐이 아닌 것을 확인하면서 내 눈에는 마치 약속이라도 했던 것처럼 닭똥 같은 눈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내가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직원들에게 신세한탄을 하기 시작했다. 내가 여기 오기 전, 에티오피아에서부터 얼마나 힘들었는지, 핸드폰도 돈도 다 도난당하고 이집트에 왔는데 오자마자 배낭마저 없어지고, 이건 너무 한다고, 내 배낭을 꼭 찾아야 한다고 말이다.

그렇게 말을 제대로 못할 정도로 흐느끼는 나를 보고 내가 너무 안쓰러웠는지 같이 창고로 온 직원의 눈빛이 달라졌다.

“울지 마요. 내가 꼭 배낭 찾아줄게요! 우리 공항 안을 돌아다니면서 한 번 더 찾아봐요. 찾을 수 있을 거예요.”

직원은 내 배낭을 찾는 것이 본인의 일인 것처럼 공항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배낭을 찾기 시작했다. 카이로 공항은 정말 컸다. 우리는 꽤 오랜 시간동안 타 항공사 사무실에 쌓여있는 짐부터 공항 내에 모든 컨베이어벨트 주변까지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어?!”

거의 마음을 비우고 모든 것을 포기 했던 그 때, 내 눈에 익숙한 색이 들어왔다.

‘파란색 레인커버’

어느 컨베이어벨트 옆에 마치 버려진 것 같아 보이는 짐들 사이에서 파란색 레인커버가 살짝 보였다.
나는 그곳으로 뛰어가 확인을 했다. 나는 그 자리에서 주저앉았다. 그리고 또 울었다.

내 배낭이 거기에 있었다.

전쟁터에서 어쩔 수 없이 생이별했던 가족을 다시 찾은 심정으로 나는 내 배낭을 안고 울었다.

“내가 말했잖아요. 꼭 찾을 수 있을 거라고.” 직원이 내 배낭을 자신의 등에 메며 말했다.


다시는 못 찾을 것 같았던 내 배낭을 3일 만에 찾았다. 기적처럼 찾았다. 아마 이 직원의 도움이 없었다면 나는 절대 내 배낭을 찾을 수 없었을 것이다.

“고마워요. 고마워요. 정말 고마워요.”

몇 번이나 고개를 숙이며 직원에게 고맙다고 인사했다. 직원은 편의점에서 과일 주스를 하나 사서 뚜껑까지 열어 주며 말했다.

“당신 정말 운이 좋네요. 이렇게 행운이 다시 시작된 거니까 남은 여행도 즐겁게 할 수 있을 거예요. 행운을 빌어요.”

주스가 정말 달다.

나는 낡아빠진 파란 레인커버가 덥힌 무거운 16킬로그램의 배낭을 등에 업고 그 누구보다 행복하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숙소로 돌아왔고, 나는 숙소에 있던 모든 이들에게 엄청난 하이파이브 세례와 축하를 받았다.

이제야 제대로 이집트 여행을 시작할 수 있을 것 같다.

‘이제는 날 떠나지마 배낭아. 내가 더 잘할게.’

 

No.184
Hot but charming, Luxor, Egypt

 

 

 

‘그을린 발등에 넋두리’
- Cairo, Egypt

 

No.178
My feet, Cairo, Egypt

에티오피아에서부터 고생한 것도 모자라 이집트 가방 실종 사건까지 겪고 나니 온 몸에 긴장이 풀린 것 같다. 그런데 체력까지 와르르 무너졌는지 독한 몸살과 고열이 겹쳐 날 괴롭힌다. 이렇게나 아픈나를 돌봐주는 사람도 없으니 인도 녹야원에서 정성을 다해 보살펴 주셨던 지훈 스님이 생각나 괜히 서럽기도 하다. 숙소 침대에 누워있으니 보이는 건 천장과 내 발등 뿐. 아프리카를 거쳐 온 내 발등에 전쟁에서 살아남은 영웅에게 남은 영광의 상처와 같은 슬리퍼 자국이 선명했다. 성공적인 여행에 큰 몫을 한 소중한 발. 앞으로도 고생해 줄 발에게 넋두리한다. 오래된 친구처럼 말대꾸 하나 없이 묵묵한 발이 고맙다.

 

- 이집트 사막에서

 

No.181
Fennec Foxes, Egypt

 

- 아부심벨 신전 열쇠를 들고

 

 

 

 

[Israel]



‘8개월 만에 가족 상봉’
- Tel aviv, Israel


작년 12월에 가족과 작별인사를 하며 얼굴을 본 것이 마지막이다. 여행 도중엔 마음 약해 질까봐 많아야 일주일에 한번 메일 주고받은 것과 두어 번 통화한 게 다였다. 다정다감한 부모님은 내가 메일을 보내면 항상 무뚝뚝하게 답장을 하시곤 했다. 평소엔 절대 그런 분들이 아니시지만 왜 그렇게 답장을 하는지는 딸인 내가 더 잘 알고 있다. 마음 약해지지 말라고, 충분히 집을 그리워하고 있을 막내딸임을 너무나도 잘 알기에 당신 스스로가 더 냉정하고 무뚝뚝해지시기를 선택하신 것이다.

여행을 하는 그 시간동안 아무리 멀리 있어도 가족에 대한 사랑은 더 뜨거워졌고, 힘듦을 이겨낼 때마다 엄마의 간절한 기도가 느껴졌다.

이집트에서 이스라엘로 이동하는 발걸음이 가볍다.
마치 그간의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기분마저 든다.
바로 며칠 뒷면 그토록 그립던 엄마, 아빠를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부모님이 이스라엘로 오시는 이유는 단 하나. 8개월 째 못 본 여행하는 방랑자 딸을 보기 위해서이다. 마침 한 살 많은 친언니가 항공사에 취직하게 되면서 항공권을 싸게 이용할 수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언니는 직장에서 일을 해야 하기 때문에 함께 일정을 맞춰 오지는 못했다.

나는 미리 엄마, 아빠를 만나기로 한 도시인 이스라엘 서부 지중해 연안에 있는 텔아비브로 가 있었다. 그리고 ‘그 날’이 하루하루 손꼽아 기다렸다.

‘그 날’ 저녁, 엄마 아빠가 알려주신 도착시간에 맞춰 텔아비브 공항으로 향했다. 그런데 내가 시간을 잘 계산하지 못한 탓에 공항에 너무 늦게 도착해 버렸다. 서로 연락할 길도 없었던 터라 공항에 나타나지 않는 나를 얼마나 걱정하고 계실까 그게 더 걱정이 되었다.

약속시간에서 거의 한 시간 늦은 시간에 공항에 도착했다. 그리고 부모님이 나오셨을 출구를 찾아 전속력으로 뛰었다. 그리고 공항 일층의자에 앉아 계씬 엄마, 아빠를 발견했다.

일층으로 내려가는 에스컬레이터에서 큰 소리로 소리쳤다.

“엄마! 아빠!”

엄마 아빠는 본능적으로 딸의 목소리를 알아채시고 주변을 두리번거리시기 시작했다. 그리고 에스컬레이터에서 뛰어 내려오는 까무잡잡한 막내딸을 발견하신다.

- 이스라엘에서 부모님과

나는 어렸을 때부터 항상 한약을 달고 살았다. 몸이 선천적으로 너무 약해서 아무리 먹어도 살이 안찌고 잔병치레도 많았다. 그랬던 딸이었는데, 앞뒤로 커다란 배낭을 메고 뜨거운 태양아래 속절없이 타버린 까무잡잡한 피부에 예전보다 족히 5kg은 더 쪄서 튼실해진 몸으로 씩씩하게 뛰어 오는 딸로 변해 있었다.

그리고 그 딸은 보이는 것처럼 정말 그동안 씩씩하게 여행해왔다. 그런데 그 씩씩했던 딸도 엄마아빠 앞에선 한 없이 어린 아이였다.

나는 엄마아빠를 와락 안고 눈물을 흘렸다. 너무 그리웠고, 보고 싶었어요.

여행을 하면서 만나왔던 사람들이 처음에 하나같이 물어보는 질문인 지금까지 어디 여행지가 장 좋았는지, 가장 재미있었던 것은 무엇이었는지, 어디 음식이 맛있었는지는 엄마아빠에겐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어디 아픈 데는 없는지, 사건 사고는 없었는지 물어보는 것이 엄마아빠의 가장 중요한 질문이었다. 우리 세 명은 그렇게 공항을 쉽게 벗어나지 못하고 한참을 의자에 앉아 얘기를 나눴다.


우리는 텔아비브에서 며칠간 시간을 보내고 이스라엘의 수도인 예루살렘으로 이동해 이스라엘 여행을 이어나갔다.
엄마아빠와 함께 한 일주일간의 이스라엘 여행은 그 어느 때보다도 행복했다.

텔아비브의 해변으로 간식을 싸가지고 가서 수영과 함께 피크닉도 가지며 낮 시간을 보냈다. 우리 셋이 수영복을 입고 바닷물에서 첨벙거리며 놀았던 때가 언제였던가. 셋이서 손을 잡고 파도를 뛰어 넘고, 물에 빠져가며 참 행복한 시간들이 흘렀다. 시내에서 함께 장을 보면서 신기한 음식도 같이 먹어보고, 한국가이드와 함께 편하게 에어컨 나오는 차를 차고 다니며 관광지를 돌아다니는 내가 그동안 못해본 편안한 여행을 함께 했다. 헐어빠진 티셔츠를 버리고 시장에서 새 티셔츠도 사고, 먹고 싶은 음식도 고민 없이 먹을 수 있었다. 8개월간 서로 못했던 이야기들을 일주일에 나눠서 하려니 하루하루가 소중하고 시간이 부족했다. 힘들 땐 그렇게 안 가던 시간이었는데, 눈 깜짝할 사이에 일주일이 지나가 버리더라.

“벌써 내일이야? 내일 가야돼?”
그냥 비행기 표고 뭐고 다 취소하고 일주일만 더 같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엄마, 나 그냥 엄마아빠랑 한국 돌아갈까?”

“할머니가 이번에 수로 만나면 위험하게 여행 그만하라 하고 한국으로 데리고 오라고 하셨어. 그런데 엄마는 수로가 여행하는 거 응원해. 네가 목표한 거 다 이루고, 즐기고, 고생도 하고 와. 엄마는 너한테 한국 돌아가자는 말 안할게.”

엄마 아빠는 역시 나보다 강하시다.

 

- 나를 가장 울게 했던 할머니의 편지

안 왔으면 했던 ‘그 날’이 왔고, 우리 셋은 함께 공항으로 갔다.

엄마, 아빠가 한국으로 돌아갈 때는 절대 울지 않겠노라고 공항으로 오는 내내 다짐을 했었다. 그런데 그렇게 꾹 참고 있었던 눈물샘이 말을 듣지 않고 눈물을 쏟아내 버렸다.

우는 딸의 얼굴을 마지막 장면으로 보여드리고 싶진 않았는데..
울지 말라고 얼굴에 흐르던 내 눈물을 닦아 주시던 아빠의 따뜻한 손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리고 눈물을 참고 있는 엄마아빠의 감정을 느꼈다.

“수로야, 밤이 더 늦게 전에 얼른 가봐. 엄마아빠는 이제 들어갈게.”

엄마아빠도 앞으로 씩씩하게 여행 할 딸에게 부모의 우는 모습을 마지막으로 보여주고 싶진 않았을 것이다.

시내로 돌아가는 내내 눈물이 멈추지가 않았다. 다시 한국에 돌아가면 볼 엄마아빠인데 왜 이렇게 서럽게 우는지 머리로는 이해가 잘 안되었지만, 흐르는 눈물을 머리로 멈추게 할 수는 없었다.

그 뒤로 여행 중 부모님의 무뚝뚝한 답장은 여전했다.
부모님의 한 수를 더 보는 그 깊은 생각과 사랑하는 마음이 전달되는 것도 여전했다.


- 이스라엘 교회에서 기도를 하며

 

김물길

스물넷에 떠난 컬러풀한 세계일주 '아트로드' 저자

이름처럼 사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22개월간 그림을 그리며 세계 이곳저곳을 여행하고 돌아왔다.
계속 이번 여행에서처럼 드라마, 코미디 그리고 로드무비의 주인공으로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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