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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극 – 반응 = 고독, 작가 김인숙

14.10.17 0

 

 

자극과 반응, 인간관계를 설명하는 간단한 공식이다.

아이들과 수업을 하다 보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아이와 아이의 가족에 관한 정보를 얻게된다. 일을 하는 곳이 잘 사는 동네인데, 그 동네 아이들은 일단 의식주 걱정이 없어서 외관상으로는 굉장히 밝다. 그래서 처음에는 아이들의 얼굴을 보고 긴장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수업을 하다 보니 아이들의 마음이 닫혀있는 것을 느꼈다. 엄마가 집에 있어도 아이의 마음을 돌봐주지 않는 경우도 많고, 부모님이 바쁜 탓에 자신의 생각을 말하지 못하기도, 그래서 호기심이 이상한 쪽으로 흐르는 아이도 있었다. 영어 유치원에 다니며 좋은 옷을 입은, 궁전 같은 아파트에 사는 아이들은 ‘바빠서 자신과 놀아주지 못하는 부모들’과 이야기하기를 기다린다.

 

어떤 아이는 내게 “엄마가 돼서 같이 살자”고 했다. 일주일에 한 번 보는 내게 아이가 무한한 사랑을 바라는 것 같아서 -하지만 나는 안타깝게도 그의 부모가 아니기에- 그 날의 수업은 곤란한 마음으로 끝이 났다. 아이들의 인생에서 지금이 지나가는 과정이라면, 그저 그렇게 ‘지나가는 사람’인 내게 부모에게는 보여줄 수 없는 적나라한 자신을 보여주고 싶었나 보다. 사람은 진짜 자기 자신의 모습을 보여줄 상대를 찾곤 하니까. 아이를 키워본 적이 없어 잘 모르겠지만, 그런 이유로 ‘진짜 자신’의 모습을 보이는 거라면 ‘아이의 마음을 받아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아이들은 자신의 무한한 사랑을 받아줄 사람이 필요하다. 자신의 존재를 인정해주고, 자신의 존재라는 씨앗에 흠뻑 물을 주고 키워주기를 바란다. 하지만 일과 세상에 지친 부모들은 아이들의 마음을 이해해주지 못할 때가 많다. 소중한 새싹에 물을 주어야 할 때, 도리어 화를 낸다거나 스마트 폰을 주며 아이의 관심을 부모 밖으로 돌린다. 아이가 관심을 끌 때 부모가 제대로 반응하지 않으면, 아이들은 자신의 말에 즉각 반응하는 스마트 폰을 부모보다 좋아한다. 그리고 자신만의 세상을 만들며 부모에게는 단지 ‘혼나기 싫어서’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래서 아이들은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모습을 보이려 한다.

 

관계는 점점 쌓이는 것이므로, 자극과 동시에 반응을 보여야 아이는 길을 잃지 않고, 부모의 사랑을 찾는다. 그러나 요즘에는 세상이 너무 힘들어 부모가 자극조차 주지 않기에, 아이는 반응하는 법을 모르고 그저 자라기만 한다. 세상을 대하는 어떤 벽과 함께, 자신을 사랑하는 방법을 모른 채 그렇게 성인이 된다.

 

‘현대인들은 고독하다’. 어째서 고독하다는 것은 슬픈 감정인데 저렇게도 ‘참’ 쉽게 이야기할 수 있을까? 그건 너무 많은 자극이 사람들에게 전해져서, 사람과 나눌 수 있는 자극과 반응이 모두 줄었기 때문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어떤 한 사람만의 문제가 아닌, 우리 모두가 자극과 반응이 줄어들어서 우리는 고독하다. 그리고 사람보다 감정을 덜 쏟아도 반응하는 ‘스마트 폰’과 감정을 공유하려 든다.

 

김인숙 작가의 작품은 우리를 보여준다. 가지런한 네모 판의 호텔에는, 두꺼운 시멘트 벽이 사람과 사람 사이를 가른다. 지금 살고 있는 아파트 안, 사람들 각자에게는 저마다의 이야기가 있다. 하지만 그것은 공유되지 않는 이야기이며, 공유하고 싶어 하는 사람도 없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마주친 사람들은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쓴다. 1층에 내려와 담배를 자주 태우는 12층 아저씨, 가끔 홍대입구역까지 차를 태워주시던 7층 아주머니, 내가 인사를 해야만 웃는 옆집 아주머니와 가족들을 빼면 매번 봐도 누가 누구인지 모르겠다. 이건 내 잘못일까?

 

모두 비슷한 공간에 있지만, 이야기는 다르다. 작품 안 속 호텔 방에서도 각각 다른 이야기가 펼쳐진다. 과연 우리는 ‘시간을 공유하고 있다’고 볼 수 있을까? 또한 ‘함께 살아간다’고 할 수 있을까? 우리는 정의하기 애매한 관계들과 함께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작품은 철저하게 사람에 관한 이야기이지만, 타인은 없는 ‘개인의 집합’에 관한 이야기다. 이는 자칫 ‘전체’인 것 같지만, 손에서 싸하게 사라지는 ‘모래’같은 집합이다. 가끔 수업 때 “우리 가족만 잘되면 돼요”라고 말하는 아이 같다. 사회는 한정된 공간에서 ‘우리만의 가치’가 최선이라고 생각하게 한다.

현대사회는 눈을 보고 대화하지 않는 세상이다. 그래서 우리는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읽어낼 수 없다. 타인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어떤 마음인지, 어떤 마음을 전해야 하는지 알지 못한다. 우리는 태국 쌀로 만든 밥 같은, 점성 없는 곳에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작가의 작품에서 많은 배경을 차지하는 밤은 고독의 시간이다. 밤에는 자극을 줄 ‘깨어있는 사람’ 많지 않으니 반응할 것들을 찾아 나선다. 그러니 더 강한 자극을 찾게 된다. 반응이 없을수록 강한 자극을 찾아나서는 것이다. ‘밤거리의 여성을 찾는 사람들’도 어쩌면 그녀가 자신에게 ‘적극적인’ 반응을 하는 사람이라 생각하기 때문이 아닐까. “남자는 외로울 때가 있다”면서 룸살롱을 찾던 선배가 생각난다. 아마 그 사람의 마음을 온전히 이해해주는 사람이 없어서겠지, 이제와 생각해보니 그 선배가 불쌍하다.

 

 

누군가는 ‘chic’하고, 누군가는 ‘자유롭다’고 말하는 도시는 애초에 달콤해질 수 없는 곳일지도 모르겠다. 그림자만큼의 삶의 무게와 고독을 품고 가야 하는 곳, 그러니 고독은 지금을 사는 사람들의 그림자다.

 

 

 

하지만 고독이 당연한 사회는, 그래서 서로의 ‘자극과 반응’이 무뎌지는 사회는 결코 좋은 사회가 아니다. 고독을 당연시하는 것은 이기적 개인주의를 동의하는 사회다. 우리가 누군가에 대한 ‘반응’으로 ‘한 마디’씩만 해준다면, 그렇게 한 번만 더 수고해준다면 이 사회의 점성은 끈끈해질 것이다. 당장 나부터라도 오늘 엘리베이터에서 만나는 사람에게 인사를 건네야겠다.

우리가 서로의 관계에서 지치지 않는 사람이 되기를. 그림자처럼 따라오는 고독을 순하게 이끄는 사람이 되기를. 그리고 그 사람들이 모여 서로의 고독을 이해하는, 순한 자극과 반응들이 공존하는 사회가 되기를 바란다.

 

 

 

십사

안녕하세요, 십사입니다.
미술, 만화영화, 춤, 피천득님, 법정스님을 좋아합니다.
살아있음을 기쁘게 여기며, 지혜롭고 성실하게 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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