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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소한 것에 대하여, 작가 이미경

14.11.19 0

 

 

 

 

어릴 적 사진을 정리했다. 기억에 남는 것도 있고 내가 기억하지 못한 추억도 있다. 그 때는 디지털카메라가 없던 시절이라 가족들끼리 놀러 갔을 때나 사진을 많이 찍었다. 하지만 그 외에도 특별하지 않은 날, 특별하지 않은 공간에서 찍힌 나는 정말 즐겁게 웃고 있었다. 사진의 배경은 예전에 살던 집 마당, 붉은 철쭉 꽃이 훤하게 핀 꽃나무 옆이다. 동생과 나는 체육복을 입은 채 나란히 서있다.  마루에서 피아노를 친다거나 생일 때 받은 케이크를 먹는 아주 일상적인 사진에서는 더 밝게 웃고 있다. 2살 때 자신이 무엇을 했는지 기억 하는 아이들도 있다지만, 개인적으로 그렇게 기억력이 좋은 편이 아니라 어린 시절 모습이 잘 기억 나지 않는다. 하지만 일상 속 사진을 보면 마음이 편해진다. 나를 즐겁게 하는 것이 ‘일상’이라는 것을, 어린 시절의 나는 잘 몰랐지만 이제는 알 것 같다.

 

 

 

우리는 큰 이벤트보다 사소한 것들을 더 잘 기억한다. 개인적인 편차가 있겠지만, 가장 눈이 부셨던 순간은 백지장처럼 기억 나지 않는다. 오히려 ‘찬란한 순간’을 위해 준비하던 그 때, 그 순간 순간의 모습들이 사진처럼 꼭꼭 뇌리에 박혀 있다. 면접을 보던 순간, 면접관과 나눴던 질의문답이 아닌 면접관의 표정을 기억한다.

나는 면접관을 바라볼 때 눈과 눈 사이를 보거나 귀를 응시해서 눈이 너무 자주마주치지 말라는 스터디원의 조언을 듣고 로봇처럼 고개를 움직였다.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하고 면접관과 눈이 마주쳤던 순간이 기억난다. 아주 살짝 여유로웠던 그 순간이, 아직도 내게 성공의 기억을 안겨준다.

 

 

 

 

오답노트를 가져가면 자세히 알려주던 중1 학원의 수학 선생님이 생각난다. 가끔은 나를 무시하던 사람들의 얼굴과 무시 당했던 순간이 섬광처럼 지나간다. 칭찬을 해주시던 할머니의 눈빛과, 전교회장 선거에서 나를 바라보시던 담임 선생님의 얼굴. 그리고 이제는 나의 눈을 마주치며 자신의 이야기를 늘어놓는 아이들.

아이이기 때문에 내가 잘 해준다는 것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 같다는 나의 투정에 할머니는 “사람들에게 선하게 대하면 그만큼 돌아와. 아이도 네가 베푼 것을 느낀다. 그건 다 기억해.” 라고 말했다.

 

 

 

 

 

작가 이미경의 그림은 언제 어디서든, 우리가 볼 수 있는 장면이다.

 

내가 '구멍가게' 펜화를 연작하게 된 것은 97년 퇴촌으로 이사하고 난 뒤다. 나라가 IMF 진통을 겪느라 허리띠를 졸라매던 시기다. 관음리에서 도수리까지 걸어 다니는 일상이 반복되면서 발견한 양철지붕 구멍가게를 촘촘한 펜으로 표현하기 시작했다. 비닐하우스 작업실에서 손가락이 휘어지도록 속도를 내어 그리기 시작하였고 그림 한 점이 완성될 때마다 그 그림 안에서 충분히 쉬었다. 햇살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비춰지기에 내 그림들 또한 여유로움으로 비춰졌으면 하는 바램이다. – 작가의 말

 

 

 

 

 

아마도 동네 할머니들은 슈퍼 앞 평상에서 노닥노닥 이야기를 나눌 것이다. 슈퍼에는 시원하고 아주 달콤한 수박이나 아이스크림이 있을 것이다. 24시간 편의점이 주지 못하는 ‘정’은 서비스로 함께 말이다.

쨍쨍한 형광등 아래 24시간 정렬된 음식물과 출처를 알 수 없는 삼각김밥, 30초 내로 데워먹을 수 있는 핫바는 도시의 일상이다. 도시는 여유를 주지 않는 곳이고, 그 틈에 사는 사람들은 틈을 메우기 바쁘다. 하지만 ‘틈’은 원래 메워질 수 없는 곳이었으므로 허한 마음은 분열되어 외로움으로 남아있다. 아마 도시가 외로운 건 다들 쪼개진 마음을 메우는 방법을 모르기 때문이 아닐까. 그래서 저 달이 더 건조해 보이는지도 모르겠다.

 

 

 

 

순간의 이야기와 순간의 얼굴들, 그리고 힘과 에너지가 쌓여 나의 하루를 만든다. 때론 얼마 되지 않는 과거의 기억들이 하루를 망가뜨릴 때, 자꾸 과거로 나를 불러 맥을 풀리게 할 때가 있다. 그 땐 지금의 사소함을, 지금 두 발로 걷고 있음을, 두 손이 지금 움직이고 있음을 스스로 상기한다. 과거의 힘들었던 혹은 즐거웠던 기억들도 이제는 ‘언젠가의 이야기’가 돼 버렸다. 더 이상 과거의 사소함에 나를 묶지 않아야 오늘의 내가 보인다는 평범한 이야기가 너무나 절절한 노래 같다.

 

“너 자신을 사랑하라, 오늘 하루를 귀하게 여겨라, 사람을 소중히 하라.” 사소한 진리의 이야기들이 더욱 밝게 빛나는 밤이다.

 

 

 

십사

안녕하세요, 십사입니다.
미술, 만화영화, 춤, 피천득님, 법정스님을 좋아합니다.
살아있음을 기쁘게 여기며, 지혜롭고 성실하게 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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