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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것들에 대한 예의

15.01.20 1

 

혼자서도 잘 가던 식당이 사라졌다. 입에도 맞고 손님이 바글거리지 않아 혼자 들어가 식사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그러나 하도 오래된 건물인 탓에 건물주가 헐어버린 모양이다. 주인 아줌마는 어디로 가셨을까, 요새는 통 가보지도 못 했는데… 주머니에 손을 넣고 돌아오는 길이 허무함으로 가득했다. 이렇게 갑자기 없어져버리는 것들에 대한 아쉬움은 누구나 하나쯤 가지고 있다. 그 대상이 사람이라면 공허함이 몇 배로 클 것이다. 아직은 사람을 ‘잃는 일’ 보다는 ‘얻는 일’이 더 많은 나이인지라 구체적으로 감정의 크기를 가늠할 순 없지만 글쎄, 무언가를 잃는다는 것은 으레 ‘가슴에 구멍이 나는 느낌’ 일까. 그러고 보면 이 ‘좋은 것’ 들이 사라져버리는 것은 보통 예상치 못한 일인 경우가 많다. 그래서 가슴이 뚫린 느낌이 더 큰 모양인가보다.

 

화가들에게도 너무 일찍 가버린, 좋은 이들이 여럿 있다. 이들의 공통점은 누구보다 주위 친구들을 아끼고 사랑했으며, 자신 또한 사랑 받았다는 것이다. 오늘 이야기할 두 화가는 서른 살도 살지 못하고 세상을 등졌다. 이들을 아꼈던 많은 이들과 훌륭한 작품을 남겨둔 채. 정말 아까운 인재들이다.

 

 

- <자화상> 바지유, 1865-1866,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 소장, 출처: http://en.wikipedia.org

 

 

 

 

남 프랑스의 부유한 가문에서 태어난 프레데릭 바지유(Jean Frédéric Bazille)는 화가 이전에 의학도였다. 그림을 그리겠다는 그의 강한 의지에 가족들은 ‘대신 의학을 공부할 것’을 조건으로 바지유의 파리 행을 허락했다. 같은 시기 파리에는 앞으로 인상주의의 큰 거목이 될 젊은 청년들이 속속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모네, 르누아르, 피사로, 시슬레… 학교에서 가르치는 고전의 엄숙함과 하층민의 시골생활대신 나날이 발전하는 도시, 파리에 넘실거리는 빛과 사람들을 그리고 싶어했던 이들은 금세 친구가 됐다. 밝고 선한 성정(性情)을 가졌던 바지유는 곧 이 무리의 일원이 되어 특히나 ‘고마운’ 친구가 됐다. 당시 하루하루 끼니를 이어가는 것 조차 힘든 친구들에게 그림을 몇 점씩 사곤 했던 것이다. 게다가 지금도 나름 부자동네라고 하는 파리 17구에 개인 아틀리에까지 가지고 있던(이건 지금이라고 쳐도 엄청나게 부러운 일이다. )바지유는 친구들의 그림을 걸어놓고 공간을 사용하도록 했다.

 

- <콩다민 가에 위치한 바지유의 아틀리에Bazille's Studio; 9 Rue de la Condamine> 바지유, 오르세 미술관 소장, 1870, 출처 : http://en.wikipedia.org

 

 

 

 

 

콩다민 가(Rue La Condamine)에 위치했던 바지유의 아틀리에는 곧 화가들뿐만 아니라 문인과 음악가들까지 모이는 아지트가 되었다. 피아노를 치는 에드몽 메트로를 뒤로 한 채 이들은 그림 이야기에 심취해있다. 모자를 쓴 마네는 이 젊은 친구들에게 좋은 멘토 역할을 해 주었던 것 같다. (여담이지만 뼛속까지 파리지앵이었던 마네에게는 ‘내 손에서 똥 냄새가 날 거다!’ 라며 악수를 거부했던 세잔보다는 이제 막 발돋움하려는 어린 세대가 더 편했을지도 모른다) 그림 중앙에 서 있는 키 큰 청년이 바로 프레데릭 바지유다. 훤칠한 외모를 가졌다고 하더니 옆모습만으로도 어딘가 가슴이 두근거린다. 게다가 바지유의 모습을 그린 건 마네라고 하니 객관적으로 봐도, ‘심쿵’ 이었던 게 틀림없다. 자신의 작품을 두고 이야기하는 바지유와 친구들 뒤로 걸려있는 그림은 르누아르(오른쪽 위의 큰 그림)와 모네(아래의 정물화)의 것이며, 바지유 자신의 작품이기도 하다. 특히나 르누아르는 이 아틀리에에서 바지유와 함께 작업활동을 했다.

아틀리에에 모여 그림에 대한 이야기, 혹은 시시콜콜한 여담들을 나누며 이들은 아무것도 없는 젊은 날을 즐겁게 보냈던 모양이다. 서로를 그리며 또 그들은 얼마나 재미있었을까.

 

- <그림을 그리는 프레데릭 바지유 Frédéric Bazille peignant à son chevalet> 느루와르, 파브레 미술관 소장, 1867, 출처 : http://en.wikipedia.org

 

 

 - <가족 모임Family Reunion> 바지유, 오르세 미술관 소장,  1867, 출처 : http://en.wikipedia.org

 

 

 

 

 

그리고 이 그림이 그려진 해, 바지유는 자원입대를 한다. 프랑스와 프로이센간의 보불전쟁이 터진 것이다. 모네는 런던으로 피신했고, 르누아르는 징집되었지만 어찌어찌 살아남았다. 이후의 파리 코뮌에서도 드가와 마네는 무사히 살아남았다.

 

그러나 바지유만은 29살의 나이로 전사했다. 친구들과 함께한 시간을 담은 이 그림이 바지유의 마지막 그림이 된 것이다. 이후 시작되는 인상주의의 전성기를   누리지도 못한 채 바지유는 친구들의 기억 속에 자리하게 됐다. 자신의 가족을 그린 그림에서 보이는 빛의 포착이나, 부드러운 붓 터치로 보아 그가 오래 살았더라면 아마 인상주의의 한 주축이 되어있지 않았을까 한다.

 

우리나라에도 사람 좋아하고 그림 좋아하고, 다만 몸이 약했던 젊은 화가가 한 명 있었다. 고람(古藍)전기(田琦)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조선 후기에 개성에서 한약방을 운영하는 중인이었던 전기는 그림 실력으로도 유명했다. 추사 김정희에게 인정받는 제자였던 그는 동기였던 우봉 조희룡과 역매 오경석과 특히 절친하게 지냈다. 특히 조희룡은 전기보다 거의 40살 가까이 위였음에도 전기의 그림실력을 아끼고 사랑했다고 전한다. 바지유의 아틀리에처럼 전기의 약방은 그림 그리는 이들의 사랑방이자 마켓이었다. 그가 살던 19세기 중반의 조선은 신분계급의 엄격함이 천천히 풀어지고 있어 특히나 자유롭게 예술활동을 하는 중인들이 많았던 시기였다. 그랬기에 그가 두루두루 친분을 쌓고 그림을 주고받는 일에 어려움이 없었을 것이다. 특히나 조희룡은 ‘풍채가 빼어나고 젊은이답지 않은 고아한 운치와 멋이 있다’ 라고 그를 평가했을 정도니 전기가 얼마나 사람들에게 사랑 받는 인물이었는지 알 법 하다.

 - <매화서옥도>,전기,  출처 : http://m.cfnmk.or.kr

 

 

 

 

 

 

아직 눈이 더 올 모양인지 어둑한 하늘 아래로 소담히 모여있는 설산, 그리고 흐드러지게 핀 매화 숲을 해치고 주황 옷을 입은 이는 친구의 집으로 가는 길이다.

 

방 안에서 초록색 옷을 입고 친구를 기다리는 집주인까지 딱 두 명뿐인 이 그림은 왜인지 볼 때마다 설레고 먹먹하다. 좋아하는 친구를 만나러 가는 길이 이런 마음일까. 우측 하단에 쓰인 ‘역매 오경석이 초옥에서 피리를 불고 있다’ 라는 글귀로 보아 전기 본인이 오경석의 집을 찾아가는 모양이다. 호를 ‘역매(亦梅)’ 라고 붙였을 정도로 매화를 사랑하는 친구의 집에 그 사랑이 가득 피었으니, 술이나 한잔 하러 놀러 가는 발걸음이 얼마나 가볍고 설레었을까. 기다리는 이 역시도 늦지 않았으면 좋을 텐데, 언제쯤 오나 하며 창으로 고개를 쑥 내미는 모양이 귀엽다.

 

 전체적으로 날카롭거나 거칠지 않은 남종화의 성격을 가지는 이 <매화서옥도(梅花書屋圖)>는 눈송이처럼 가지에 매달린 매화의 표현과 함께 중간중간 색채를 삽입해 수묵화를 산뜻하게 보이도록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 그림이 마음에 와 닿는 것은 전체적으로 깔려있는 ‘기다림’과 ‘설렘’ 탓이다. 이 고개만 넘으면 그토록 아끼는 친구가 있을 것이고, 슬쩍 고개를 내미는 초록빛 잎들과 매화는 곧 다가올 봄을 기다리게 한다. 일생을 소란함 없이 정갈하고 부드러웠던 전기(田琦)의 성정이 그대로 그림에 배어있는 듯 하다. 그러나 전기가 가지지 못한 것은 바로 건강이었다. ‘건강하지 못한 것이 늘 걱정’ 이었던 전기는 바지유와 같은 나이인 스물 아홉에 건강이 악화되어 세상을 떠났다. 조희룡이 슬퍼하며 바친 시에서 전기의 주위 사람들이 느꼈을 비통함과 슬픔이 그대로 전해진다.

 

그대가 저 세상으로 가 버리니

이승에 남은 나는 외롭기만 하구나

흙덩이가 냉정하다고는 알고 있지만

끝내 그대의 열 손가락도 썩고야 말 것인가.

 

드라마 <하얀거탑>에서 죽음을 가까이 둔 애인에게 여자는 딱 한마디 한다. “당신, 오랫동안 기억해줄게.” 그리고 <가족끼리 왜 이래>의 불치병 아버지는 예비 사위를 실컷 괴롭히고는 “이래야 나를 오래 기억해주지.” 하며 슬쩍 눈물을 닦는다. 사람이 진짜로 죽는 순간은 의사에게 사망선고를 받는 순간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잊혀지는 순간’이라고들 한다. 어느 순간 없어져버린 무언가가 항상 좋았던 기억만으로 남아있는 건 아닐 것이다. 그렇지만 지금 흘러가는 이 시간도, 옆에 있는 누군가도, 내가 존재하는 이 곳도 오랫동안 기억된다면 그럼 그거야말로 상실에 대한 해결책이 아닐까 싶다.

 

나이를 한 두 살씩 먹어갈수록 무언가 없어지는 것에 대한 아쉬움이 조금 덜하지 않을까, 조금 담담해지지 않을까 생각하곤 했다. 그런데 살아보니 아니다. 오히려 바람이 더 거세게 드나드는 느낌이다. 그래서 태도를 바꾸기로 한다. 아쉬워하되, 잊지는 말 것. 그래야 내 기억 속에서만큼은 오래오래 살아있을 테니.

 

 

 

김월

나의 글이 사람들에게 즐거움과 영감이 되길 바랍니다.
예술과 친근한 세상을 만들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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