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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세기 파파라치 : 고굉중(顧閎中)의 <한희재 야연도>

15.02.24 0

 

어느 늦은 밤, 정치거물의 대저택에서는 연회가 한창이다. 군주의 밀명을 받고 연회에 참석한 젊은 두 화원은 비지땀을 흘린다. 얌전히 궁정에서 그림만 그리던 젊은이들은 연회의 분위기를 북돋우는 아가씨들의 차림새만큼이나 화려하고 문란한 밤에 정신이 팔릴게 뻔하다. 다시 한 번 마음을 다잡고 연회장의 구석구석을 머릿속에 담는다. 풀어헤친 앞섶들, 맨다리에 휘감겨있는 한희재와 무리들, 어지럽혀진 침상, 거나하게 차려진 술상, 간드러진 음악소리, 비싼 가구들, 아련히 맡아지는 묘한 향내까지.

 

왜 우리의 군주는 방탕한 밤의 주인을 곁에 두려고 하는가? 젊은 화가는 곳곳을 살피던 중 붉게 취해 어린 아가씨들의 시중을 받던 거물과 눈이 마주친다. 화가는 연회장을 뛰쳐나가고, 거물은 껄껄껄 웃다가 시종에게 손짓한다. 연회를 가장한 길고 길었던 연극은 그렇게 끝났다.

 

드라마의 한 장면이냐고? 단 하나의 그림으로 중국미술사에 길이 이름을 남긴 고굉중(顧閎中)의 <한희재 야연도> 속 숨겨진 이야기다. 이 그림을 처음 접하는 사람이라면 마치 사진을 보는 것 같은 상황묘사와 세밀한 표현, 그리고 화려한 색채에 마음을 빼앗길 것이다. 작품을 매력적으로 만드는 건 단순히 ‘잘’ 그렸기 때문이 아니다. <한희재 야연도>는 그저 그런 중국회화가 아니다. 현대로 치자면, 대통령의 밀명을 받은 젊은 공무원의 파파라치 컷이다.

 

- <한희재 야연도 (韓熙載 夜宴圖)>고굉중, 오대 남당, 10세기 후반, 북경 고궁박물관, 출처 : http://gchfg.com/index.php?c=product&id=356

 

 

 

 

긴 두루마리 표현과 실내 기물로 묘사한 ‘귀족의 생활풍속화’는 중국 전통의 회화법칙을 따른다. 인물은 하늘하늘한 실선으로 가냘프고 여리여리한 당대의 미인상을 나타낸다. 여기까지는 전의 회화와 같은 노선을 걷고 있으나 고굉중(顧閎中)은 혁신을 꾀했다. 바로 '사실성'이다. 사진으로 찍은 듯한 세밀한 표현은 당대 삶의 리얼리티라고 볼 수 있겠지만, 그림의 제작의도가 '기록' 이었기에 묘사는 더 강조됐다. 주인공인 한희재(韩熙载)는 그림의 가장 중심에 놓여 5개의 장면에서 등장한다.

 

- <한희재 야연도> 부분, 침상 장면. 맨 좌측에 근엄하게 앉아있는 인물이 바로 한희재다.출처 : http://www.nlc.gov.cn

 

- 높은 모자를 쓰고 앉은 한희재의 뒤쪽에 보이는 침상에는 분명 누군가가 있다! 출처 :http://tweets.seraph.me

 

 

 

 

<한희재 야연도>에서 빼놓을 수 없는 또 하나의 요소는 바로 '암시' 다. 언뜻 보기에 그림은 매우 고상하고 아름다워 보이지만 그 속에는 방탕함과 문란함이 존재한다. 풀어헤친 한희재의 옷이나 흐트러진 침상, 벽 뒤에서 반쯤 몸을 내밀고 비밀스러운 태도를 취하는 기녀의 모습은 충분히 상상력을 자극한다. 이 작품이 명작으로 여태까지 남은 것 역시 사람들의 비밀스런 내면을 자극한 ‘암시’ 때문이다. 예나 지금이나 스캔들은 항상 화젯거리 아니던가.

 

- 연회에 초대된 손님들 역시 고굉중의 파파라치 샷을 피할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출처 :  http://www.daoon.com

 

 

 

 

그렇다면 <한희재 야연도>는 어떤 속사정을 가졌을까? 한희재는 본래 북쪽의 산동성 출신으로 강남으로 내려와 남당 조정의 신임을 받으며 관료생활을 하고 있었다. 당시 남당(南唐, 937~975)의 새로운 군주 이욱(李煜)은 따뜻한 남쪽나라에서 '한번 사는 인생 화려하게 살아보자!!'는 아티스트적인 성정을 맘껏 발휘했다. 흥청망청의 끝은 결국 나라에 위기를 불렀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이욱은 북쪽 사정에 밝은 한희재를 재상으로 등용하려고 했다. 그러나 이미 저물어가는 남당의 정세를 간파한 한희재는 그동안 남당의 조정에서 받은 신임과 애정을 모두 내려놓고 대저택 안으로 숨어버린다. 굳이 나서서 패색이 짙은 체스 판의 킹이 될 필요는 없었던 것이다.

 

한희재가 정말로 방탕한 인물인지, 아니면 일부러 자신을 피하는 것인지를 알아보기 위해 이욱은 두 명의 젊은 궁정화원을 스파이로 보낸다. 주문구와 고굉중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이들은 다른 손님의 초대장을 들고 손님으로 가장해 화려한 연회장으로 숨어든다. 한번 본 것은 잊어버리지 않기로 유명했던 고굉중은 젊은이 (고굉중과 한희재의 나이차가 대략 30살이니 한희재에게는 고굉중이 치기어린 애송이로밖에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라면 누구나 가졌을(그것도 공무원!)투철한 애국심으로 한희재의 대저택에서 벌어지는 엄청난 향락을 목격한다. 그리고 돌아와 <한희재 야연도>를 그려낸다.

 

아마 그 당시 고굉중의 기분은 서태지-이지아 스캔들을 터뜨린 스포츠신문 기자의 마음과 같지 않았을까 싶다. 하지만 그는 몰랐다. 자신이 한희재 연출-한희재 각본 연극의 가장 훌륭한 관객이었다는 것을 말이다. 연출자가 원하는 대로 관람해주고 원하는 방향으로 역사에 길이 남을 리뷰까지 남겨줬으니 반평생이 넘도록 정치판에 몸담았던 늙은 여우 한희재는 고굉중에게 꽤나 고마웠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리고 곧 송나라가 등장해 이욱도, 한희재도 모두 잊혀졌지만 고굉중의 파파라치 샷 <한희재 야연도>만이 중국 미술사에 길이 남았다.

 

- <라오 리의 야연도 Night Revels of Lao Li> 왕칭송 (王庆松), 120x960cm, 2000, 출처 : http://www.wangqingsong.com

 

 

 

 

 

2000년, 베이징에서 활동하는 작가 왕칭송(王庆松, 1966~)이 다시 한 번 <한희재 야연도>를 재창조했다. 왕칭송은 무정부주의자로 끊임없이 중국 역사에서 지식인의 사회적인 위치와 운명을 돌이켜보는 작업을 진행했다. 왕칭송은 과거와 현재의 지식인의 심정을 대조시키기 위해 <한희재 야연도>를 패러디한 <라오 리의 야연도>를 만들었다. 작가는 아름답고 화려한 남당의 지식인이었던 한희재가 현실에 맞서 싸우지 않고 조용히 대저택에 숨어 부패한 사회를 바라만 보며 방임의 자세를 보였다고 평가한다. ‘현실을 마주하는 자세’에서 인간의 변하지 않는 모습을 반영한다는 점에서 이 두 작품은 결국 평행선상에 존재한다.

 

 이 그림이 그려진 의도는 어찌 보면 기록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고굉중의 탁월한 표현력으로 <한희재야연도>는 이야기 자체가 전설이 되고 보는 이들에게 즐거운 상상을 하게 하는 명작이 됐다. 또한 작품 내의 디테일한 가구, 식기도구, 악기 표현은 중국회화사뿐 아니라 공예사 및 음악, 무용을 연구하는 데 당대를 이해하는 중요한 사료다. 또한, 인간내면의 가장 솔직한 모습을 직시하고 그것을 스스럼없이 표현했다는 점에서 진화하는 인류의 발전을 보여주고 있기에 <한희재 야연도>는 명작의 칭호를 얻게 된 것이리라.

 

 

 

김월

나의 글이 사람들에게 즐거움과 영감이 되길 바랍니다.
예술과 친근한 세상을 만들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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