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킹스맨(Kingsman)'에게 바치는 경의

15.03.13 3


-<007 Sky fall> 출처 : http://lifebetweenframes.blogspot.kr

 

 

 

 

Q: 저 그림을 보면 멜랑콜리해져요. 위대했던 전함이 불명예스럽게 끌려가는 모습이라니.. 정말이지 세월이란 어쩔 수 없나 봐요. 뭐가 보이세요?

007 : X나게 큰 배. (A Bloody big ship.)

 

<007 Skyfall>에서 007과 그의 무기담당인 쿼터마스터(이하 Q)가 처음 만난 곳은 윌리엄 터너(Joseph Mallord William Turner 1775~1851)의 <전함 데메테르 (The Fighting Temeraire)> 앞이었다. 과거를 뒤로 하고 해체를 위해 끌려가는 노장 데메테르 호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제임스 본드의 모습은 ‘요즘 젊은 애들’인 Q에게 세월 어쩌고 하는 감상을 내뱉게 했다. 이제는 예전 같지 않은 몸에 머리까지 심란한 와중에 그런 감상이라니, 본드가 왜 욕을 했는지 알 것도 같다.

 

최근 영화 <킹스맨>이 입소문을 타고 날로 기록을 갈아치우고 있다. 심지어 청소년 관람불가 등급임에도 불구하고 전 세계에서 영국 다음으로 우리나라가 흥행 점유율 2위를 차지하고 있다. 영화 <킹스맨>을 지탱하는 몇 가지 키워드를 꼽자니 엉뚱하게 콜린 퍼스(Colin Firth)의 해리 하트가 아닌 다니엘 크레이그(Daniel Craig)의 007, 제임스 본드가 떠오른다. 그것도 금발의 아가씨들 사이에서 폼나게 총을 쏘는 007이 아닌 이제는 체력 테스트조차 제대로 통과하지 못하는 <Skyfall> 속 제임스 본드 말이다. 하필 그가 복잡한 눈빛으로 응시하고 있는 그림이 다 늙어 퇴역하는 전함의 마지막 모습이라니. 이쯤 되면 감독도 참 너무하지 싶다.

 

- <최후의 정박지로 예인되는 전함 데메테르 호, 일명 ‘전함 데메테르’ (The Fighting Téméraire tugged to her last Berth to be broken, The Fighting Téméraire)> 윌리엄 터너, 1839, 런던 내셔널갤러리 소장, 출처 : http://en.wikipedia.org/wiki/J._M._W._Turner

 

 

 

 


이 그림을 그린 작가 윌리엄 터너(William Turner)는 아직까지도 영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화가에 꼽힐 만큼 영국을 대표하는 작가다. 우리나라에 국민여동생(김연아), 국민첫사랑(수지), 국민요정(정경미..?)이 있다면 영국의 국민화가는 바로 윌리엄 터너(William Turner)가 아닐까 싶다. 이 분의 일생으로 말할 것 같으면, 르네상스 시절의 라파엘로(RAPHAEL)를 꼽을 수 있겠다. 그는 런던 중심가에서 태어나고 자라면서 일찍이 (한국으로 치면 중학교에 입학할 나이에) ‘왕립 예술 아카데미’에 합격하고 이듬해에는 전시 참가자격까지 얻었다. 27세가 되던 해에는 개인 갤러리를 런칭할 만큼 승승장구하는 삶을 살았다.

 


- 성 요한 교회를 드로잉한 작품. 그런데 이게 12살 때 그린 그림이라고 한다. 12살. 내가 초등학교 5학년 때 미술시간에 그려 낸 것들을 생각해보면..왕립 아카데미, 인정, 출처 : http://en.wikipedia.org/wiki/J._M._W._Turner

 

 

 

 

터너가 일찌감치 화단의 인정을 받았다고 해서 기득권 입맛에 맞는 그림을 그린 것은 절대 아니다. 터너가 살았던 시기에 프랑스는 살롱에서 인정하는 주제 -고전, 그리고 그것을 빙자한 예쁜 누드- 만이 살아남았던 반면, 영국은 당시 유행했던 ‘그랜드 투어(Grand Tour)’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랜드 투어는 오늘날의 관광여행의 초석이 되는 여행으로 귀족과 예술가를 양성하는 아주 지적인 여행이었다. 특히나 귀족 자제들은 모든 교육과정을 마치고 사교활동과 컬렉션을 위한 여행을, 예술가들은 타지의 예술가들과 교류하고 기술을 공부할 수 있는 1년 이상의 느긋한 휴식이자 기회였다. 타지의 이색적인 풍광이 주는 신선함은 아마 지금 우리가 여행을 떠나는 이유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그들이 아주 조금 더 부유하다는 것?

 

이처럼 ‘신선한 세계의 이미지’를 선호했던 영국 화단에서 여기저기 끊임없는 여행을 통해 탄생한 터너의 풍경화는 호평을 끌어낼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풍경화 속에 ‘해가 지지 않는 나라 영국!’의 이미지까지 첨가했으니 누구던 ‘100점!’ 을 외칠 수 밖에. 하지만 터너가 영국의 국민화가로 등단할 수 있었던 건 터너 본인이 자연을 연구하고 관찰하며 보고 느끼는 모든 것을 캔버스에 담으려 했기 때문이다. 당시의 미학자 샤프츠베리 경(Lord Anthony Ashley Cooper, 3rd Earl of Shaftesbury)은 <미술론>에서 ‘미술의 아름다움은 정신의 아름다움에 기여할 때 주어지는 가치다’ 고 했는데, 터너는 이에 따라 관람자들에게 자연이 주는 숭고함을 느끼고 맛볼 수 있도록 앞장선 작가였다.

 

- <비, 증기, 그리고 속도 Rain, Steam and Speed> 윌리엄 터너, 1884, 런던 내셔널갤러리 소장, 출처 : http://en.wikipedia.org/wiki/J._M._W._Turner

 

 

 

일찌감치 유명세를 얻고 평생 화가로서 인정받으며 산 삶이었지만 터너의 작품은 그 어디에서도 허세(내가 제일 잘나가!)가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점점 더 진솔해지고 명확해지는 ‘화가’ 로서의 터너가 있을 뿐이다. 특히 변화무쌍한 영국 하늘의 순간순간을 포착하려고 했던 평생의 노력은 말년 작품인 <비, 증기, 그리고 속도>에 이르러 결실을 맺는다. 빛을 그리는 사람들, 즉 ‘인상주의’라는 새로운 사조의 탄생을 암시하고 커다란 영양분이 된 것이다.

 

나폴레옹을 물리쳤던 넬슨 함대의 선봉장 데메테르 호는 이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이제 첩보원으로서 갓 발을 디딘 어린 천재 Q의 눈에는 이 그림에서 단순히 세월의 무상함을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터너가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은 바로 30여 년을 선봉에서 싸웠던 영국 해군의 상징, ‘킹스맨’ 데메테르에게 바치는 경의와 존경이었다. 제임스 본드는 이러한 터너의 뜻을 캐치한 모양이다. 지나간 과거는 젠틀하게 보내주고, 다시 새로운 임무에 뛰어드는 007요원으로 거듭난 걸 보면.

 

 

김월

나의 글이 사람들에게 즐거움과 영감이 되길 바랍니다.
예술과 친근한 세상을 만들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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