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랑이는 가죽을, 사랑은 향기를, 뮤즈는 흔적을 남기고 – 데이비드 호크니 (David Hockney)

15.06.03 0

 

누구나 한 명쯤 있지 않을까? ‘동경합니다.’ 라는 말로 표현하고 싶은, 작게는 좋은 감정에서 크게는 삶 전체에 큰 깨달음을 준 사람. 일부분으로 시작했다가 삶 전체에 호감을 느끼게 된 사람 말이다. 이렇듯 ‘누구처럼 되면 좋겠다’고 느끼거나, 본인도 모르게 그 사람의 모습에 자신을 끼워 넣은 경험이 한 번쯤은 있었을 것이다. 이런 경험은 으레 흔적을 남겨놓기 마련이다. 가령 옷을 고르거나 책을 고를 때 ‘마음속 그 사람’의 모습을 떠올리며 집어 드는 것처럼, 그 사람의 흔적은 글을 적거나 그림을 그릴 때도 무의식적으로 묻어 나온다.

 

 

- <와터 근처의 더 큰 나무들(2007)>을 보고 있는 관람객들과 데이비드 호크니

 

 

 

데이비드 호크니의 전시를 보러간 적이 있다. 전시관에 들어서자마자 시야를 압도하는 작품도 인상적이었지만, 아마 함께 있던 영상이 아니었다면 이렇게까지 선명하게 기억하지 못했을 것이다. 옆에는 그의 작업과정을 세세하게 담은 다큐 영상이 틀어져 있었다. 좋지 않은 전시환경 때문에 집중이 잘 안 됐지만, 그의 작업과정 만큼은 관람객을 집중하도록 만들기 충분했다. 지긋한 모습에 시원찮은 걸음걸이로 풀숲과 마을 곳곳을 누비던 그는 붓을 잡을 때만큼은 번뜩이는 소년의 눈이 됐다. 떨리는 손으로 나뭇가지와 이파리를 힘차게 그려 넣는 그를 보면서 호크니를 동경하던 사람들의 마음을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호크니가 많은 사랑과 관심을 받는 작가라는 것은 애써 소개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그는 이미 아티스트들에게 동경의 대상이 된지 오래다. 화가이자 사진작가기도 한 그는 회화와 사진 모두 자신만의 방식으로 작업한다. 그는 지금까지 한 폭의 그림을 여러 캔버스로 담아내거나 한 컷의 사진을 여러 필름으로 나눠 찍어 붙이는, 새롭고도 매력적인 작업들을 선보였다. 이렇듯 1960년대부터 계속해서 작업을 이어온 호크니는 자신보다 더 어리고 젊은 작가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안겨주고 있다. 비록 겉으로는 백발이 성성한 ‘영감님’의 모습이지만 자신의 작품에 대해서는 분야를 막론하고 많은 이들에게 ‘독창적인 영감’을 불어넣는 혈기왕성한 작가인 것이다.

 

- 아이패드로 작업하는 데이비드 호크니

 

 

 

며칠 전, 그의 사진을 검색하다 웬 런웨이 사진을 발견했다. 아니나 다를까, 사진 속의 옷들은 ‘Writers and Painters’라는 주제 아래 작가 앨런 배넷과 데이비드 호크니에게 영감을 받은 버버리 디자이너인 크리스토퍼 베일리의 작업이었다. 앨런 베넷이 즐겨 입던 자켓과 타이, 데이비드 호크니가 즐겨 쓰던 색 조합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크리스토퍼의 옷에는 두 작가에 대한 동경심 역시 가득하다. 두 작가의 모습을 찾아보는 재미가 있는 그의 컬렉션은 또 다른 작가들에게 새로운 영감을 줬을 것이다.

 

- 데이비드 호크니의 <Interior with Sun and Dog>과 버버리프로섬 2014 Spring Collection ‘Writers and Painters’ 사진

 

 

 

호크니는 한 장의 사진과 한 폭의 그림을 소중하게 여겼던 사람이다. 여러 장의 사진과 여러 개의 캔버스가 합쳐져야 완성 되는 작품 특성상, 그는 그것을 이루고 있는 한 장의 작업에도 신중을 가했다. 다큐멘터리에서 그는 50개의 캔버스를 하나씩 들고 풍경 속으로 직접 뛰어들었다. 풍경에서 다시 돌아와 합을 맞춰보면서도 호크니는 하나의 캔버스가 온전히 자신의 작품이 될 수 있도록 꾸준히 작업에 매달렸다.

 

- 호크니의 작업물

 

 

전시에 가기 전, 한 폭의 캔버스에 담을 수 있는 장면을 굳이 50개에 나눠 담는지 의문이었다. 하지만 형광 핑크빛을 띄는 한 캔버스를 발견하고 나서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확 튀는 색을 지니고도 나머지 49개의 캔버스와 손깍지를 낀 것처럼 딱 들어맞는 캔버스를 보면서, 호크니가 그림을 그리러 간 수많은 날 중 예쁜 노을빛이 스며든 모습을 짐작했다. 섞어 바른 물감 색 하나로도 그는 작품에 쏟은 많은 시간을 헤아리게 만드는 사람이었다.

 

아티스트들의 인터뷰 기사를 읽다보면 ‘당신에게 영감을 준 뮤즈(muse)는 누구인가?’는 질문을 자주 접할 수 있다. ‘Muse’는 시인과 예술가들에게 영감과 재능을 불어넣는 고대 그리스 여신 이름으로, 음악(music)과 박물관(museum)이라는 단어도 여기서 유래했다고 한다. 음악과 박물관에서 많은 영감을 얻기도 한다는 점을 곰곰이 생각해보면 충분히 납득할만한 이야기다. 하지만 같은 음악을 듣고 함께 전시관에 있어도 그 ‘영감’이라는 것을 모두가 받는 것은 아닌데, 왜 작가들은 자신에게 다가온 수많은 존재를 ‘여신’으로 칭하는 것일까. 영국 요크셔 시골마을의 풍경을, 핑크빛 노을을 본 사람은 호크니 뿐만은 아니었을 텐데 어떻게 그 장면은 호크니를 통해 하나의 작품이 됐을까.

 

뮤즈는 지나간 모든 것들을 기억하는 ‘학문의 여신’이기도 하다. 지나간 모든 것들을 기억하고 싶은 학자들에게 뮤즈의 등장은 큰 깨달음과도 같았을 것이다. 호크니는 자신이 봤던 것을 끊임없이 기억하고자 노력했다. ‘우리는 기억과 함께 봅니다. 내 기억은 당신의 기억과 다르기 때문에 우리가 같은 장소에 서 있다 하더라도 우리는 같은 것을 보지 않습니다.’는 말처럼 그는 지나간 것들을 놓치지 않고 기억하기 위해 눈앞의 광경을 오랫동안 바라봤다. 이러한 노력이 바로 많은 작가가 그를 뮤즈로 꼽는 이유이며 많은 작가가 자신의 작품에 호크니라는 흔적을 남기는 이유이기도 하다.

 

- <데이비드 호크니>展 안내책자

 

 

 

지나간 모든 것들을 기억할 수는 없지만, 살아온 삶에는 마주한 사람들이 남겨놓은 흔적이 남아있다. 좋든 나쁘든 간에 그것은 나를 이루고 있고, 가끔 내가 그 기억을 소중하게 여기게 될 때 그들은 내게 뮤즈가 된다. 호크니의 그림과 크리스토퍼의 옷들을 나란히 보고 있자니, 내가 누군가에게 주는 기억이 옷과 색과, 글에 흔적으로 남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의 뮤즈가 되어 흔적을 남기고 싶다-고 생각하던 중에 영국 밴드 muse의 대표곡이 떠올랐다. Time is running out. 내가 본 것을 그려내기 위해서는 좀 더 바지런히 움직여야겠다. 많은 작가가 동경하는 호크니가 소년같이 숲을 헤치던 것처럼.

 

- 데이비드 호크니, 출처 : http://www.theguardian.com

 

 

 

정미 (Jeongmee)

일상 속의 작은 것들을 놓치지 않는, 큰 손을 가진 작가를 꿈꿉니다.
정(情)과 미(美)를 찾아 정미(精微)하게 그려내는 글쓰기를 희망합니다.
instagram,com/leejeongmee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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