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함과 문란함 by.트레이시 에민 (Tracey Emin)

15.06.05 1

 

세상에는 다양한 모양의 열쇠와 열쇠구멍이 존재한다. 이 말은 상투적이고 어떻게 보면 진부할 수도 있지만, 그래도 ‘사랑’에 대해 이야기할 때 이보다 더 적절한 표현을 찾기 힘들다. 열쇠와 구멍이 딱 맞든 아니든, 만나서 무언가를 열기 위해 시도하는 모든 행위가 사랑을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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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쇠와 열쇠구멍의 만남은 대부분 실패로 끝난다. 이를테면 구멍이 너무 크면 열쇠가 쑥 들어가 이리저리 후벼대다 쉽게 빠진다. 그리고 구멍 안은 온통 피투성이가 된다. 반대로 구멍이 너무 작아서 힘겹게 맞추다 보면 열쇠가 휘거나 구멍이 망가진다. 어느 한 쪽이 닳고 닳아서 나머지 한 쪽에만 상처가 남는 경우도 있다. 그게 열쇠든 구멍이든. 결국 딱 맞는 열쇠와 구멍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우리의 목적은 열쇠와 구멍이 정확히 만나 무언가를 여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서로 맞지 않아도 맞추기 위해 무언가를 했다는 것이 중요하다. 다시 말해 우리는 ‘정확한 반쪽’을 찾기 위해 타인을 만나는 것이 아니다. 근사값을 찾기 위한 과정 속에서 조금씩 자신이 가진 모양을 변화시키는 것이 이런 무모한 일을 반복하는 이유다.

 

 

 

<My bed> 트레이시 에민, 설치작품, 1999

 

트레이시 에민의 <my bed>. 술병, 생리혈이 묻은 속옷, 콘돔, 피임약, 휴지조각 등 엉망진창이다. 하지만 그 속에서도 외로움이 절절하게 묻어나는 침대. 이 침대를 볼 때마다 나는 슬픔을 느낀다. 함께 있어도 외로운 순간들이 있는데 그녀는 그걸 잘 아는 듯하다. 이렇게 어지럽혀진 침대를 보고 누가 그녀를 문란한 여자라고 욕할 수 있을까. 아니, 과연 누군가에게 문란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 가능한가. 이렇게 말하는 순간, 그 말은 방향을 바꿔 다시 나에게 날아올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묻고 싶다. 그녀를 향해 비난의 말을 던지고 눈살을 찌푸릴 만큼 당신은 순수하냐고. 당신의 몸 말고 '당신의 머릿속', 저 침대보다 더 어지러운 당신의 머릿속은 과연 얼마나 깨끗하냐고 말이다.

 

 

 

<나와 함께 잤던 사람들 (Everyone I have Ever Slept With 1963-1995)>

파란 텐트 안에는 90명에 달하는 사람들의 이름이 꿰매져 있다. 그 중에는 후원자를 비롯해 친척들도 있다고 한다. 해당 작품은 찰스 사치가 구매했지만 화재로 소멸한 것으로 알려졌다.
▶ <나와 함께 잤던 사람들> 비하인드 스토리 듣기

 

트레이시 에민의 또 다른 작업 <나와 함께 잤던 모든 사람들 1963-1995>. 사람들은 "잤다" 라고 말하면 육체적 관계를 맺었다는 의미로만 받아들인다. 하지만 여기에는 남자친구의 이름뿐 아니라, 자신을 키워준 할머니의 이름, 가족,친구, 낙태로 인해 태어나지 못한 아기의 이름까지 적혀있다. 그녀가 생각하는 순수함, 당신이 생각하는 문란함은 사실 같은 의미일 수도 있다. 상반된 단어들이 마구 뒤섞이기 시작한다.

 

 

 

 

나에게 미술가가 된다는 것은
멋진 것들을 만든다는 것만은 아니다.
그것은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다
- 트레이시 에민-

 

 

반질반질한 열쇠와 열쇠구멍은 상처가 부끄럽지 않다. 상처가 없으려면 맞는 척 슬쩍 끼워 넣거나 맞지 않아 돌아가는 방법뿐이다. 하지만 상처 없이 반짝반짝한 열쇠만큼 보기 싫은 것도 없다. 상처가 상처를 덮고, 상처가 상처를 무감각하게 만들었다고 또 어느 누군가 말한다. 어느 순간 상처가 나고 상처가 상처를 덮고, 상처가 아무는 과정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열쇠는 점점 처음의 모양을 잃어가지만 점차 단단해져 갔다.

 

'이제 아무도 원하지 않겠어' 라는 말만큼 어리석은 말도 없다. 우리는 본래 외로운 존재라 다시 사람을 원하고 누군가가 원하는 대상이 되길 바란다. 반대로 '영원히 한 사람만 사랑하겠어' 라는 말도 무책임하거나 우습다. 그렇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이가 몇이나 될까. 그냥 이를테면, "백 명 정도 사랑할거야" 라는 말이 가장 솔직하고 인간답다. 우리는 문란함을 꿈꾸며 순수하게 행동하는, 혹은 순수하게 생각하며 문란하게 행동하는 그저 ‘인간’일 뿐이다.

 

 

​솔비(Sol-B)

글을 씁니다.
기억과 공간, 감정에 관한 이야기를
나를 닮은 글이 누군가에게 기억되길 바라며
나를 바꾸고 이전과 같이 생각하지 않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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