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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리 가려고 하는 나에게, 미래주의

15.09.18 0

<Unique Forms of Continuity in Space> Umberto Boccioni, bronze, 1913.

 

무엇이든 새로운 것은 쉽지 않다. 새 학기가 시작되니 강철 멘탈로 무장한 동기들도 보이고, 나약해진 내 자신의 모습도 보인다. 이번 학기 초에는 많은 잡다한 일들이 나를 괴롭혔는데, 심약한 나는 3월에 가졌던 초심이 모두 엉켜버린 것 같아 속상했다. 잡다한 일들이 얽히자 가장 괴로웠던 건 나를 둘러싼 모든 일이 ‘나를 괴롭히려고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진 것이다. 그러니 매사에 행복한 일이 있을 수가 없고, 남을 탓하기 시작했다.


‘빨리 가려고 하는 마음’은 사람을 병들게 만든다. 지난 2주가 그랬던 것 같다. 빨리 가고 싶다는 이상과 열망은 높으나 그 열망을 제대로 내 것으로 만들지도, 이겨내지도 못한 자괴감이 나를 짓눌렀다. 그래서 너무나도 쉽게 상황에 흔들렸고 아무것도 사람도 아닌 사람에게 상처받았다.


<The City Rises> Umberto Boccioni, 1910.

 

제주도에 내려가 살고 있는 친구는 지금은 조금 느리게 가는 법을 배웠다고 말한다. 그리고 아마 자신도 서울에 있었다면 자신을 남과 비교하고 빨리 가기 위해 노력했을 거라 말한다. ‘서울’이라는 장소의 특성이 있는 것일까? 아마 아주 간과할 수는 없을 것이다. 서울은 사람들이 많고, 그래서 그들끼리 비교 할 수 있는 환경이다. 무엇보다 “불안하다.”고 느끼는 이유는 남보다 빨리 가야 하지만 자꾸 늦춰지는 내 자신을 보기 때문이다. 신문지 상에서 수도 없이 보던 이야기가 내 이야기가 되면, 세상이 탁하게 보인다. 다른 사람들의 경험을 내가 겪는 순간에도 명료해지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들의 이야기가 내가 사는 세상까지 수채화 물감처럼 번져온다고 해도 그들의 이야기와 나의 이야기가 같을 수는 없는 것이다. 이기적이고 모순적인 이야기다.


그렇다면, 세상에 나만 존재하게 돼도 비교를 하게 될까? 아니면 하지 않게 될까? 이번 주말까지도 휘청휘청 했던 내 모습이, 종이 인형같이 매 순간 화를 내려고 하는 모습이 문득 안쓰러웠다. 나는 뭐가 이렇게 ‘불안’한 걸까? 내게 ‘속도를 낸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Self-portrait>Umberto Boccioni, oil on canvas, 51.4 x 68.6 cm, Metropolitan Museum of Art,  New York City, 1905

<Riot in the Galleria> Umberto Boccioni, oil on canvas, 64 x 76 cm, Pinacoteca di Brera, Milan, Italy, 1909


이탈리아에서 발생한 미래주의 사람들은 ‘속도’를 가진 예술이 아름답다고 주장했다. 전통을 파괴하고 움직이는 도시의 모습과 그 역동성을 표현하고자 했던 미래주의 작가들은 전쟁을 찬미했고, 그 끝에 파시즘과의 결부가 있었다. 극단은 극단을 불러오는 법이다.

 


미래파라고도 하며, 이탈리아어로 '푸투리스모'라고 한다.
전통을 부정하고 기계문명이 가져온 도시의 약동감과 속도감을 새로운 미(美)로써 표현하려고 하였다.
이 운동은 1909년 시인 F.T.마리네티가 프랑스의 신문 《피가로 (Le Figaro)》에
〈미래주의 선언 (Manifeste de Futurisme)〉을 발표한 것이 시작이다.
이 선언에서 마리네티는 과거의 전통과 아카데믹한 공식에 반기를 들고 무엇보다도 힘찬 움직임을 찬미하였다.
이러한 경향은 전쟁을 찬미하기도 하고, 미술관이나 도서관을 묘지(墓地)로 단정,
그 파괴운동을 벌일 정도의 과격한 것이었다.

 

-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미래주의 [futurism, 未來主義] 

 

 

<Dynamism of a Dog on a Leash> Giacomo Balla, oil on canvas, 91 x 110cm, Albright-Knox Art Gallery, Buffalo, NY, USA, 1912

 

<Street light> Balla, oil on canvas, 174.7 x 114.7 cm, Museum of Modern Art, New York, USA, 1909

 


<Iridescent Interpenetration No. 4 - Study of light> Balla, oil and pencil on paper, 42 x 49.5cm, Galleria Civica d'Arte Moderna e Contemporanea, Turin, Italy, 1912

 

속도의 미(美)를 연구해서 구상이며 움직임을 보이던 작품들은 추상으로 그 형태가 이어진다. 속도의 미를 찾아 구상에서 추상까지, 극단을 향해 가고 있는 이들의 작품은 선구적이면서도 순간에 응축된 에너지에 힘을 얻는 것을 넘어 힘이 빨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저 속도를 따라간 그들의 삶은 행복했을까? 그리고 그들은 속도를 이겨낼 수 있었을까? 그들의 시간이 파묻히지는 않았을까 궁금하다.

 

내게 지속되는 단점이 있다면 싫어하는 사람의 잔상을 계속 가지고 있는다는 것이다. 그 사람은 이런 나를 잘 알지도 못하는데 그의 잔상은 유령처럼 매 순간 나를 괴롭힌다. 가끔은 내가 그의 모습을 꽉 움켜쥐고 놔주지 않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히려 어딘가에는 있을지 모르는 진실은 묻어둔 채 그 사람을 나 혼자 괴롭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중요한 건, 내가 움켜쥐고 있는 것이 그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오늘날 세계는 우리가 이해하기에는 너무 방대하다.
너무나 많은 일이 벌어지고 있고 너무나 많은 범죄가 벌어지고 있고,
너무나 많은 폭력과 자극적인 일이 일어나고 있다.
열심히 뛴다고 뛰고 있지만 경기에서 항상 뒤쳐지고 있다.
사람들과 발걸음을 맞추는 것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하지만 여전히 지고 있다.
과학기술의 발달은 하루가 멀다고 새로운 발명품을 쏟아내고 있어 나와 당신을 어리둥절하게 하고 있다.
정치계도 너무 빨리 변하고 있어서 누가 누군지 알 수 없다.
감당하기 어려운 스트레스만 받는다. 더 이상 버틸 수 없다!


-출처 : 32. 180년 전에도 마찬가지였다 | 작성자 솔개



글은 지금으로부터 180년 전 1833년 6월 16일 '애틀랜틱 저널(Atlantic Journal)'에 실린 사설이다. 그 당시에도 모든 것은 ‘너무 빠르게 변했고, 감당하기 어려운 스트레스를 받는 시대’였다. 조급증에 걸린 것이 나의 조상들에게도 해당되는 이야기라니 갑자기 마음이놓인다.


극단으로 가는 길은 버려야 한다. 쉽지 않지만 그게 내가 해야만 하는 일이다. 느리게 사는 건 쉬운 일은 아니지만, 앞서 가려는 심장을 부여잡고 제 자리에 오게 하는 일이 현대 사회에 꼭 필요하다. 극단으로 가면, 극단에서 사라지고 말 것이다. ‘앤트맨’처럼 정말 작아지는 순간에도 적은 있기 마련이기에 나의 속도와 방향이 필요하다.


현실에 대한 과격한 성찰보다 채우고 집중하는 성찰을 하는 내가 되기를 바란다. 아주 식상한 광고문구 같지만 지금의 내게 꼭 필요한 방향이다. 너무 빨리 가면서 많은 것을 놓치지 않는 내가 되기를, 새로운 시작과 함께 바라본다.

 

십사

안녕하세요, 십사입니다.
미술, 만화영화, 춤, 피천득님, 법정스님을 좋아합니다.
살아있음을 기쁘게 여기며, 지혜롭고 성실하게 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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