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Features  /  REVIEW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안규철 <안 보이는 사랑의 나라>展

15.11.24 0


손에 펜을 쥐고 종이 위에 글씨를 써 내려간 때를 더듬어 본다. 사실, 이 ‘더듬어 본다’는 표현자체가 벌써 그런 행위가 오래 전의 것임을 고백하는 것이다. 밤낮으로 키보드와 핸드폰을 오가며 텍스트로 언어를 표현하는 세상이다. 어느 라디오에서는 정말 오랜만에 도착한 손 편지 사연을 받고 내내 감격의 목소리를 냈다. 그 정도로 손 글씨는 우리의 삶 저 편으로 밀려났다. 평소처럼 화면상의 텍스트를 읽던 어느 날, 안규철 작가의 새로운 프로젝트 소식을 접했다. 익명의 1,000명의 사람들이 모여 필사본을 제작하는 작업이란다. 지극히 현대적인 발상으로, 지극히 구시대스러운 작업이라니. 황급히 일정을 예약했다.

안규철의 전시는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지하 5전시실에서 9월 중순부터 진행되고 있다. 참가자는 본인이 예약한 시간보다 10분정도 먼저 도착해(입구에서 무료 입장 티켓을 받을 수 있다)안내자의 간단한 설명을 듣고 하얀 부스 안에 있는 ‘필경사의 방’으로 안내된다.

썸네일 출처: http://view.asiae.co.kr/news

 

한국 현대 단편 모음집과 카프카의 소설 중 하나를 골라 한 시간 동안 원고지에 찬찬히 적어 내려가면 되는 간단한 작업이다, 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막상 자리를 잡고 앉아 펜을 잡고 보니 처음 쥐어보는 만년필이다. 어른의 상징이라고 생각했던 이 물건을 막상 손에 쥐고 보니 이름 세 글자부터 부들부들이다. 앞으로 적어 내려갈 글씨들이 책으로 만들어져 프로젝트에 참가한 모든 사람들에게 배포된다고 하니, 혹여 가독성이 나쁘진 않을지 틀린 글씨는 없는지(수정펜으로 수정 가능하다)온통 신경이 곤두섰다. 그런데 원고지 한 장을 채우자 어느새 내 특유의 글씨가 종이 위를 수놓기 시작했다. 오롯이 글 쓰는 데만 집중하는 한 시간. 이 사각거림과, 손에 가해지는 적당한 힘과,바삐 오가는 눈동자까지. 수행에 비견할 수는 없겠지만 완전히 무아지경으로 빠져 들…려 하던 차, 뒤에서 한 커플이 경악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오빠 저거 진짜 사람이야!”

 

<1,000명의 책> 2015



나중에 알게 된 사실. 밖에서 보기에 이 부스는 ‘필경사의 방’으로 향하는 입구가 보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관람객들은 이 작은 공간에 진짜 사람이 들어가 있다는 사실에 놀라는 것이었다. 커플의 경악을 필두로 사람들 모두 이 ‘전망대’에 올라와 한마디씩 거들기 시작했다. 대체 저긴 어떻게 들어간 걸까, 정말 뭘 쓰고 있나 봐, 저거 봐 저 사람 움직였어, 어머 어머나, 찰칵 찰칵 찰칵!

 

‘상자 속의 상자’가 이런 느낌일까. 필사자는 안규철 작가의 작업을 완성하는 나름의 ‘작가’인 동시에 관람자가 보는 하나의 ‘작품’이 되는 것이다. 작가는 노트에서 ‘이 공간에서의 작업을 통해 참가자가 격리실, 혹은 예배실에 들어가있는 체험을 하고 또 그 안에서 단절과 고독, 묵언수행과 간절한 기도의 체험을 하게 될 것’이라 말한다. 그런데 개인적으로 조금 더 인상 깊었던 점은 ‘사람들의 탄성’이었다. 일방적으로 정보를 받기만 하는 것에 익숙한 대중에게 작품이 살아 숨쉬고 움직이고 있다는 것은 새로운 발견이자 파격인 것이다. 현대미술이 주는 ‘놀라운 즐거움’이 바로 이런 걸까. ‘지금 여기가 없는 상태의 경험’을 위한 한 시간 동안의 조용한 글쓰기 작업은 비록 그 문턱 직전에서 실패했지만, 되레 그 정적을 깬 관객들의 탄성을 잊을 수 없다. 정해진 방법으로 깨달음을 얻지 못했으면 어떤가. 그 커플도 필사자도, ‘안 보이는 사랑의 나라’에 가게 된 것은 확실한데 말이다.

 


눈 깜짝할 새 약속한 한 시간이 흐르고 밖으로 나오니 뒷 사람이 들어가 마저 채우지 못한 원고지에 몰입하기 시작하는 모양이었다. 필경사의 방 안에 설치된 카메라를 통해 미술관 곳곳에서 필사자들의 ‘수행’을 지켜본다. 각자 방법은 다르더라도 이 방 안에서 익명의 1000명은 무언가를 느끼고, 얻고 돌아가지 않을까. 그리고 만들어질 두 권의 필사본뿐만 아니라 방 안에서 사람들이 생각하고 행위했던 모든 것이 모여 이뤄지는 하나의 예술작품이야말로 눈에는 안 보이지만 진정한 ‘행복의 나라’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 전시장 전경

<아홉 마리 금붕어>, 2015

<피아니스트와 조율사>, 2015

 

이번 전시의 테마는 고독과 무(無), 그리고 그 안에서 만들어지는 역설적인 창조의 아름다움으로 보인다. 각 공간에 가둬진 아홉 마리의 금붕어들은 절대 섞일 수 없기에 아름답고 음악을 연주하는 피아니스트와 줄을 빼는 조율사가 만드는 보이지 않는 ‘상대성 싸움’이 그렇다. 시각적으로 가장 가까운 것을 꼽자면 완벽하고 정갈하게 다듬어진 일본식 정원이 떠오르지만, 이번 전시에서 또 한가지 빼놓을 수 없는 요소가 ‘관객의 참여’인 만큼 우리나라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돌탑이 가까운 예가 아닐까 싶다. 작가가 원했던 ‘안 보이는 사랑의 나라’는 비록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지금 역시 무수한 관객들과 함께 만들어지는 중이다.

 

전시기간 2015년 9월 15일 (화) - 2016년 2월 14일 (일)
전시시간 화/목/금/일 오전 10시 - 오후 6시, 수/토 오전 10시 - 오후 9시 (야간개장 시 기획전시 무료, 월요일 휴관)
장소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제5전시실 (용산구 이태원동 258-340번지)
입장료 4,000원 
문의 국립현대미술관 

 

김월

나의 글이 사람들에게 즐거움과 영감이 되길 바랍니다.
예술과 친근한 세상을 만들거예요!

0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