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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퍼, 오마주, 성공적 – 셜리는 풀지 못한 난센스 퀴즈

16.02.17 0

빨래를 개려고 TV앞에 앉았다. TV를 켜는 그 순간, 광고 하나가 시선을 강탈했다. 광고에서 흘러나온 SSG를 재빨리 검색했다. 화면에 등장하는 옷의 색감과 무늬가 황홀했고 배우들의 센스 있는 대사가 맘에 ‘쓱’ 들었던 탓이다. 취향저격 제대로 한 이 기특한 광고, 그런데 왜 어디선가 본 것 같지? 아, 호퍼! 며칠 전 서점에서 한참을 고민하다 제자리에 두고 온 에드워드 호퍼 화집이 생각났다. 검색 창에 SSG를 지우고 에드워드 호퍼를 검색했다. 그렇게 <셜리에 관한 모든 것>을 보게 되었다.

영화 <셜리에 관한 모든 것> 포스터, 출처: http://www.siaff.or.kr/?project


영화는 길었다. 전시장에 걸린 몇 장의 그림들을 2시간 가까이 바라본 기분이었다. 영화 자체가 관객에게 깊이 있는 이해를 바라는 것 같지 않았다. ‘의욕 없는 도슨트’와 함께한 느낌이랄까. 영화평을 봐도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지 모르겠다는 반응이 대부분이었다. 그들의 리뷰의 공감하는 건 나 역시 영화를 보며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이 살아 움직인다!’는 인상 빼고는 기억에 남는 장면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특징이야말로 <셜리에 관한 모든 것>이 호퍼 덕후들에게 기억될만한 영화로 남는 이유다.


- 호퍼의 <Morning Sun>과 영화 속 장면, 출처: http://www.wikiart.org, http://www.fnnews.com



- 호퍼의 <Excursion into Philosophy>와 영화 속 장면, 출처: http://www.101bananas.comhttp://new.cinefox.com

영화는 호퍼의 그림 13장이 가진 색감과 구도, 등장인물의 모습을 그대로 옮겨 놓았다. 검은 화면 위로 제작연도가 뜨며 라디오 뉴스 내레이션이 흘러나온다. 영상의 흐름은 마치 그림을 그려나가는 듯 느리며 정적이다. 소음도, 속도도 내지 않는 13개의 Scene을 보며 감독이 호퍼를 정말 좋아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호퍼의 그림을 하나하나씩 매만지며 등장하는 여인의 모습, 그리고 제작 연도에 따라 일어난 일을 감각적으로 작업한 결과물. 그것이 바로 셜리였다.


광고는 사내에서 오래전부터 불려왔다는 ‘쓱(SSG)’을 대화에 자연스럽게 ‘쓱-’ 밀어 넣어 단조로운 대화를 화려한 색감과 예쁜 의상, 멋진 배우로 살려냈다. 처음 2개의 광고를 들고 나왔던 'SSG'는 인기에 힘입어 바로 다른 시리즈를 놓았다. 심지어 촬영장 모습을 기사로도 내보내기도 했고, 사람들의 반응 또한 뜨거웠다. 광고는 예상대로 정용진 부회장의 SNS를 통해 에드워드 호퍼를 오마주한 것임이 밝혀졌다. 

 

- 신세계(SSG) 광고

광고는 하나의 이미지를 각인시켜 시청자에게 궁금증을 유발했다. 사람들은 광고를 통해 자연스레 호퍼를 연상했고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도 분명히 전달받았다. 영화 <셜리>를 보고 나니 더더욱 그렇게 느껴졌다. 사실, 광고는 호퍼의 그림을 영상으로 옮겼다기보다 영화에 등장하는 셜리와 스티브의 모습을 대화체로 바꿨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 이다. 그러나 차가운 듯 다정한 두 남녀의 모습에서 원작과 영화에서 그려지는 고독함이나 쓸쓸함은 찾아볼 수 없다.


영화 <셜리에 관한 모든 것>의 한 장면. New york Movie(1939년)와 닮아 있다.

영화를 보고난 뒤 가장 기억에 남았던 장면이다. 상영관에 남은 노부부와 셜리. 셜리는 영화 속 대사를 읊으며 할리우드에 대해, 연극에 대해 생각한다.

 

구스타프 도이치(Gustav Deutsch) 감독은 이미 관람객의 반응을 예상했는지도 모르겠다. 예술과 사상, 문제인식과 삶의 통찰, 재미와 감동을 동시에 줄 수 있다는 자신감 대신, 그는 영화를 한 편의 아트워크로 만들어냈다. 때문에 <셜리에 관한 모든 것>을 단순히 지루하고 졸린 영화로 평가하기엔 장면마다 그려진 호퍼의 분위기가 마음을 붙들어 맨다. 그러나 콘텐츠가 주고자 하는 메시지는 몇 번을 돌려봐도 명확치 않다. 오히려 이 멋진 아트워크를 스토리가 있는 영화로 내놓으면서 한계와 단점이 명확해졌다.

- SSG 광고의 한 장면

SSG는 그렇지 않다. SSG라는 로고를 부각하기 위해 카메라가 움직이고, 당당당당 음악이 쫓아온다. 선뜻 호퍼의 이름을 내놓기에는 광고가 가진 역동성이 꽤 크고, 호퍼의 쓸쓸함과는 이질감이 느껴지는 광고다. 하지만 호퍼를 알지 못하는 이들까지 포함해 많은 사람의 마음에 ‘쓱-’ 들어간 이 광고는 벌써 유튜브 조회수 90만을 찍었다. 광고는 빛과 그림자, 화면에 등장하는 선과 같은 명확한 목적을 달성한 후 유유하게 아쉬움을 남기고 사라진다.



- 영화 <셜리에 관한 모든 것> 'Room in NewYork' 촬영현장 모습, 출처: http://movie.naver.com


영화는 사랑해 마지않는 호퍼를 담아내기 위해 무던히 노력했다. 이는 한 장면만으로도 여실히 드러난다. 아마도 감독은 (호퍼 덕후이기 때문에) 화면을 하나하나 재현하는 ‘고단한 과정’을 거쳤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영화는 감탄 그 자체였다. 제목과 영상을 끼워 맞추고, 탁월한 구도와 붓으로 칠한 것 같은 화면의 색감은 감탄을 일으키기 충분했다. 하지만 진정 ‘성공한 덕후’라는 타이틀은 SSG에게 줘야 할 듯하다. SSG를 통해 호퍼를 다시 찾아보게 됐고, <셜리에 관한 모든 것>라는 예술영화도 감상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난센스 퀴즈는 보다 단순하고 묵직하게 접근해야 풀 수 있다. 영화는 13장의 그림을 이어가느라 너무도 당연한 문제를 잊어버렸다. 그런 점에서 셜리는 오마주보다도 하나의 메시지를 전달해야 했다.

 

정미 (Jeongmee)

일상 속의 작은 것들을 놓치지 않는, 큰 손을 가진 작가를 꿈꿉니다.
정(情)과 미(美)를 찾아 정미(精微)하게 그려내는 글쓰기를 희망합니다.
instagram,com/leejeongmee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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