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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싶은 대로 보는 여성의 몸, <Great American Nude series>

16.04.19 0

<Great American Nude series> Tom Wesselmann
출처: Artplastoc.blogspot.kr


예쁜 옷을 입고 버스를 타면 흥미로운 일이 벌어진다. 내게 ‘예쁜 옷’이란 ‘치마’를 뜻하는데, 버스에서 내리려고 문 쪽으로 걸어가면 낯선 이의 시선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스캔하는 게 느껴진다. 그저 ‘치마’만 입었을 뿐이다. 재미있는 현상은 치마를 입은 다른 여성에게도 이런 일이 곧잘 발생한다는 것이다. 한 아저씨는 카톡을 하다가도 안경을 내려쓰고 여성들의 다리를 이리저리 쳐다보고 있었다. 심지어 교복이 짧은 미성년자도 말이다. 그의 눈은 굉장히 당당했다. 나와 그녀들을 쳐다보는 데 아무런 느낌조차 없어 보였다. 마치 그냥 광고를 보듯, 잡지에 나온 사람의 얼굴을 보듯, 당당하고 무관심해서 심히 당황스러웠다.

 

 

 

Great American Nude series, Tom Wesselmann
출처: http://guyhepner.com

 

며칠 전 신문에서 어떤 여성이 조카를 마구 때려 사망에 이르렀다는 기사를 봤다. 처음에 사람들은 여성을 질타했다. 살인은 그 누구도 해서는 안 되는 일이고, 아이를 학대해 죽음에 이르게 한 사실 역시 ‘질 나쁜 죄’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곧 사건의 진실이 드러났다. 조카로 알려진 아이는 알고 보니 그녀의 아들이었고, 아이의 아빠는 그녀의 ‘형부’였던 것이다. 형부라는 사람은 50대의 인물로, 20대였던 언니와 10대였던 처제를 함께 강간해왔다. 심지어 그들은 2013년 말부터 함께 살았다. 현재 27세인 그녀의 증언에 따르면 그녀는 2008년부터 형부에게 강간을 당하기 시작했고 아이 세 명을 출산하게 되었다고 한다. 천인공노(天人共怒)할 일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바로 기사에 대한 댓글이다. 물론, 형부에 관한 부정적인 댓글들이 많지만 간혹 ‘여성이 정말 싫었는데도 관계를 유지했겠냐’는 식의 댓글이 눈에 띈다. 더군다나 형부의 아이가 비단 죽은 아이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어떤 이들은 ‘싫으면서 왜 그렇게 아이를 많이 낳았냐?’고 반문하기도 했다. 그 외에도 어떻게 표현하기도 힘든 댓글이 많았다. 세치 혀로 사람을 죽이는 사람들이 계속해서 등장했다. 그리고 그들이 타겟으로 삼는 이의 대부분이 ‘여성’이라는 사실에 씁쓸해졌다. 

 

 

 

          

Great American Nude series, Tom Wesselmann
출처: http://www.radford.edu

요즘 여성들은 ‘걸크러쉬’ 혹은 ‘쎈 언니’에 열광한다. 특히 <최고의 사랑>에 출현하는 김숙은 ‘숙 크러쉬’, ‘갓숙’으로 불리고 있다. 그녀에게는 <태양의 후예>속 송중기와는 다른 매력이 있다. 그녀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생각은 했지만 쉽게 내뱉지 못했던 말’을 그녀가 대신함으로써 쾌감을 느낀다고 한다. 그녀의 발언에 대한 기사도 많아졌다. 그만큼 김숙의 인기는 여성들이 속 시원한 발언을 서슴지 않는 사회를 꿈꾼다는 것을 반영한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여성의 권리가 어떤 방법으로 올라 서야 하는지 정립 되어 있지 않다. 아직 가려진 것들이 많기에 여성의 인권에 대해 ‘무엇이 맞는 것이고 무엇이 그른 것인지’ 정확한 방향성을 모르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형부에게 강간을 당한 처제와 부인을 보고 ‘긍정적인 의문’을 품는 사람은 없어져야 하지 않을까. 그저 한낱 기사로만 치부하기에는 이런 일들이 단순하지 않기 때문이다.

 

 

Great American Nude series, Tom Wesselmann
출처: http://americanart.si.edu

 

미국의 팝아트 작가 ‘톰 웨셀만(Tom Wesselmann, 1931–2004)’의 그림을 보면 ‘여권’의 의미가 더욱 무엇이 인지 파악하기 힘들어진다. 물론, 작품이 1950년대의 대중문화와 소비 목적형 사회를 비판한다는 것은 이해할 수 있지만 계속 보고 있기 불편하다. 굉장히 관음증스러워 보이기도 한다.


빌렘 데 쿠닝(Willem de Kooning)과 앙리 마티스(Henri Matisse)에게 큰 영향을 받아 그의 작품도 커다랗고 극단적인 색채의 나체화다. 여기에 빌렘 데 쿠닝적인 야생미와 마티스적 세련미가 미묘하게 혼합되어 있으나 그들과는 또 다른 점이 있다. 즉, 타일로 치장된 욕실이나 냉장고, 창문, 변기, 화장대 등의 실물은 오브제와 똑같은 비중으로 팝 이상의 것은 아니다. 또 마티스의 그림에서 보이는 실내 구도와 비슷하지만 마티스의 밀실 분위기와는 거리가 멀고, 클레어스 T.올덴버그의 거대한 햄버거 오브제와 같은 과장된 일상성을 찬양한 것을 볼 수 있다.

그의 작품은 원근법을 모두 배제한 콜라주적인 방법, 혹은 그림과 비중이 똑같은 오브제 등을 혼합소재로 한 것으로 마티스의 유화에 대한 패러디라고 할 수 있다. 뉴욕 팝 중에서도 가장 팝적인 작가로 평가 받는다. 욕실, 침실, 거실 등에서 나체 여인을 혼합소재와 그림 등으로 다룬 수십 점의 《그레이트 아메리칸 누드》 시리즈로 잘 알려져 있으며, 1960년대 말 이후 포르노그래픽한 요소를 도입하였다.

-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톰 웨슬만 

 


Great American Nude series, Tom Wesselmann
출처: http://drawpaintprint.tumblr.com

웨셀만의 《그레이트 아메리칸 누드》시리즈를 보면 아름다운 색의 향연 속에서 뚜렷하게 보이는 여성의 관능적인 모습이 눈에 띈다. 작품은 ‘남자가 보고 싶은 대로의 여성’을 그렸다는 생각이 든다. 어떻게 보면 정말 재미있다. 그림에서는 약속이라도 한 듯, 일률적으로 강조하는 ‘부위’가 정해져 있다. 마치 여성의 모든 기관을 ‘가슴’과 ‘생식기’와 ‘입’이 대변하는 것처럼 말이다. 물론 1960년대의 작품이지만, 여성들의 몸에서 부각할 부분들이 항상 같은 저 곳들뿐이라니. 여성을 대하는 그런 단순한 태도가 아쉽게만 느껴진다.

 

 

Great American Nude series, Tom Wesselmann
출처: http://www.radford.edu

 

이 세상에 인간이라는 이름으로 태어난 순간부터, 우리 존재는 자신의 자리를 정립하고 나만의 강점을 지니고 싶어한다. 그러나 자신의 자리를 정립하는 것이 누구든 스스로가 원하는 방식으로 정립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누가 꺾는 꽃’이 아닌, ‘스스로 피어나는 꽃’이 되는 사람들이 더 많아지는 날이 오기를 기대해본다.

 

 

십사

안녕하세요, 십사입니다.
미술, 만화영화, 춤, 피천득님, 법정스님을 좋아합니다.
살아있음을 기쁘게 여기며, 지혜롭고 성실하게 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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