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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문화와 예술의 교집합, 권지안

20.06.18 0

 

‘솔비’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으레 혼성그룹 <타이푼>의 멤버이거나 보컬, 그리고 미디어에 비춰지는 어딘가 부족한 여성의 모습이다. 그런 그녀가 연예인 ‘솔비’를 뒤로 하고 ‘치유’의 목적으로 미술을 시작했고, 2012년부터 개인전을 주최하며 본격적으로 ‘예술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 8년이 흐른 2020년의 지금, 그녀는 현대예술을 자신만의 관점으로 풀어내는 한 명의 작가로 제대로 인정받고 있다. 최근에는 프랑스 파리에서 개최된 대규모 아트 축제 2019 라 뉘 블랑쉬 파리(La Nuit Blanche Paris)에 참가하여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사실, 여전히 그녀를 둘러싼 담론들은 많다.

 

하이퍼리즘:레드

 

미술을 시작한지 8년이란 시간이 흐른 만큼, 그녀의 작품도 서서히 변화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누구나 그렇듯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대상으로 그림에 담았다가, 어느새 그녀의 눈에 비추던 구체적인 사물이 시간이 흐르며 좀 더 추상적이고 기하학적인 현상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그 시절 그녀의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사람들이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이나 억압, 부담 같은 다소 부정적인 감정을 느낄 수 있다. 어떤 상황에서 한 사람이 오롯이 느끼는 감정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기란 쉽지 않다. 그런 맥락에서 그녀가 표현하는 음울한 감정의 그림은 당시에 그녀가 느꼈던 감상을 관람객이 유추할 수 있도록 유도하기에 가히 성공적이라 할 만 하다.

 

TRACE, 붓과 손을 이용해 사물에 대한 순간적인 감정을 그려내는 작업

 

그리고 그녀는 2015년부터 단순히 그림만 그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직접 작품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본격적으로 그녀의 작품이 화제가 됐던 건 2017년 <하이퍼리즘-레드(Hyperism: Red)>에서 였다.


<하이퍼리즘: 레드>

세계의 역사 대부분이 남자들에 의해 쓰여지고, 세상에 이름을 알린 권력자 뒤엔 수많은 여자들이 존재했지만 여자들은 대부분 그 역사의 각주로 쓰여졌다. 남자들은 부와 명예를 추구하며 아름다운 여자의 몸과 마음을 얻기 위해 끊임 없이 전쟁한다. 그로인해 신체적, 사회적 약자인 여성은 수많은 전쟁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으며, 자신을 지켜내기 위한 수단으로 아름다워지기를 갈망한다. 아름다움은 자신을 지키기 위함은 물론 삶의 질을 향상시키기 위한 여자의 중요한 무기이자 수단..

하지만 여성이기에 받은 상처들은 지우려해도 완벽히 지을 수 없다. 모든 상처 입은 여성의 삶이 그 무엇보다 숭고한 가치를 품은 아름다운 빨간 꽃이길 바라고 또 바란다.

블랙칼라는 상처, 레드는 부활, 마지막 화이트 칼라로 블랙과 레드의 흔적들을 닿는 행위는 상처를 치유하고 덮어가는 과정을 의미한다. 하지만 아무리 덮으려 해도 하얗게 덮어지지 않는 컨버스는 그렇게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여인의 삶을 의미한다.

“상처를 덮어지는 것이지, 지워지는 것이 아니다.”

 

 

솔비는 이 작품을 대중예술의 대표 격인 <뮤직뱅크>와 순수예술의 대표 격인 <가나아트센터>에서 자신의 작업을 동시에 선보였다. 작품에 쓰인 강한 컬러만큼이나 혹자는 충격이었다고 했고, 혹자는 신선하다는 반응이었다. 작품만 놓고 봤을 때는 그 함의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많았지만, 해설을 통해 작품을 새로이 접한 관객들은 그녀의 퍼포먼스에 찬사를 보냈다. 페미니즘이 본격적으로 대두되기 시작한 흐름에서 이러한 시도가 돋보이기도 했고, 지금까지 수많은 여성들에게 그녀의 작품이 회자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 작품 이후, 그녀에 대한 다양한 담론이 생성된 것도 물론이다.

 

 

이 후, 작품은 변화의 변화를 반복한다. 자신이 그린 그림으로 세상에 단 하나뿐인 수트를 제작하기도 했고; 이를 이용해 앨범커버를 제작하기도 했다. (작품 <blue>) 한 작품을 토대로 오감을 즐길 수 있는 작업들을 행하는 방식은 기존의 예술과 큰 차이는 없어보이지만, 그녀의 작업은 시간이 지날수록 그녀만의 정체성을 이뤄가고 있다. 물론 그녀를 비판하는 시선 중에는 가수 솔비의 ‘대중성’과 ‘저명성’을 토대로 지금의 입지를 이뤘다는 시선도 있다. 그러나 작가로서의 작업들은 관객에게 충분히 신선하고 생각할 수 있는 ‘거리’를 주었다는 점에서 유의미하다고 본다.

 

 

그 생각할 ‘거리’ 중 하나는 그녀가 대중예술과 순수예술의 경계에 서있다는 점이다. 우리가 “문화”에 대해 생각할 때 흔히 고급예술과 대중예술은 무엇인지에 대한 고민, 그 경계는 누가 설정하는가의 고민, 그리고 그 중에서 무엇이 더 가치 있는지를 고민한다. 이러한 논의는 (실상 중요하지 않지만) 과거에서부터 꾸준히 이루어져 왔다. 하지만 어쩐지 가까워질 수 없는 사이처럼 낯선 그 두 영역을 그녀가 이어주고 닜다. 그런 맥락에서 하나의 작품을 대비된 상징의 <뮤직뱅크>와 <가나아트센터>에서 동시에 소화할 수 있다는 점이 신선하다. 그 애매모호한 경계에서 유명인 솔비로서는 대중들에게 순수예술을, 작가 권지안으로서는 순수예술의 세계에서 대중문화를 매개할 수 있다는 점이다.

 

 

무엇보다 이러한 그녀의 시도가 타인의 시선에 한정되지 않고 끊임 없이 나아간다는 점에서도 울림을 준다. 그래서일까, 최근 그녀의 작품은 자신의 아픔을 치유하고자 했던 초기의 그림과는 많이 달라진 양상이다. 그녀가 회자되었던 <하이퍼리즘: 레드>의 작품 소개처럼 그녀가 받았던 (그리고 앞으로 받을) 상처가 지워지지는 않겠지만, 앞으로의 다양한 작업을 통해 새로운 예술로써 덮여지길 바란다. 그리고 그 변화의 과정에서 앞으로 또 어떤 작품이 선보여질지 기대된다.

 

김해인

읽는 사람이 즐거운,
언제나 유쾌한 글을 쓰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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