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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년의 기억- <Frozen Hero>, 임안나

15.07.21 0



왕년(往年)에 잘 안 나가본 사람이 어디 있을까? ‘자기계발서’에서는 왕년의 기억을 생각하는 사람을 거의 밥값도 못하는 사람으로 표현하지만, 사람은 저마다 마음 속에 가지고 있는 ‘왕년의 기억’이 있다. 그 기억은 비록 상대적이지만, 사람들에게 ‘한 때 잘 나가던’ 기억은 놓기 어려운 나만의 보물상자 같은 느낌이다.


어릴 때는 왕년을 기억하는 사람들을 우습게 여기곤 했다. 해병대 몇 기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들, 톱스타의 반열에서 내려왔지만 아직도 잘 나갈 때를 잊지 못해서 돈을 헤프게 쓰는 연예인들, 사업이 망해 갚아야 할 빚이 4-5억이라 딸과 아내를 죽이고 자신은 끝내 죽지 못한 서초구의 사장님, 지나간 옛날의 기억이 너무 커서 그 기억에 영영 갇혀 망상 환자로 변한 사람 등등. 세상은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 투성이라고 여겼다. 그렇지만 이제서야 나는 그들이 정상적이거나 혹은 인간적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과거의 기억에서 자유로운 사람들이 과연 얼마나 있을까? 어떤 식으로든 과거의 기억은 현재와 연결되기 때문이다.

 




부끄러운 말이지만 전에 다니던 회사 꿈을 몇 번 꾸었다. 꿈은 비슷한 내용으로 흘러가는데, 예를 들면 쭈뼛쭈뼛 회의를 하고 있는 사람들 앞을 지나가면서 나는 싱긋 웃고, 그러면 사람들이 “오! 다시 왔어?”면서 반겨준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꿈이지만 내가 그 부서를 좋아하지 않았기에 다른 부서로 옮겨가서 일을 한다는 것이다.) 꿈에서 한껏 재미있게 이야기를 나누고 또 그 사람들과 밥을 먹는 그런 꿈을 꾸고 일어나면 내 스스로가 정말 한심하기도 하다가 부끄럽기도 하고, 찌뿌둥 한 몸과 마음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일어나서 가만히 생각해보면 아직 나를 사랑하는 마음과 내공이 부족한 것 같아서 실소가 터진다. 그리고 너무 바쁘지 않게 살아서 혹은 죽도록 살지 않아서 그런가 보다 싶어 나를 채찍질 하게 된다.


혹시나 이런 꿈을 꾼 사람이 있는지 네이버에 검색해 보니 꽤 많은 카페에서 이런 글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 카페들은 아이를 가진 여성들이 모인 카페가 대다수였다. 아이를 갖고 회사를 그만둔 많은 여성들이 꾸는 꿈이라는 생각에, 나는 애도 없는데 왜 이런 꿈을 꾸는 건지 문제가 아닐까 하고 약간 당황했다. 어쨌든 꿈이지만 그것이 나의 무의식이라고 생각한다면 뒷맛이 씁쓸했기 때문에 별로 달갑지는 않다.





작가 임안나는 사용기간이 만료되어 군대에 갇혀버린 전투 비행기를 사진에 담는다. 왕년에 꽤나 잘나갔던 비행기들이다. 이 작품의 제목은 <Frozen Hero> 즉, 얼어버린 영웅이다. 조종사 없이 묵묵히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비행기는 추억을 기리는 박물관의 박제처럼, 움직이지 않는 모형처럼 남아있다. 슬픈 전쟁의 역사를 직접 목격한 비행기들은 이제 북한과는 다른 나라가 돼도 괜찮을 것 같다는, 이산가족이 된 사람들은 모두 노인이기 때문에 통일이 되지 않아도 될 것 같다고 대답하는 아이들이 사는 나라에서 ‘왕년’에 잘나갔던 구조물로 남아있다. 저 비행기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박제가 되어 버린 천재’를 아시오? 나는 유쾌하오. – 『날개』, 이상.

 

인생은 일장춘몽이라는데, 저렇게 박제된 듯 자리를 지키는 비행기들을 보면 문득 허무해진다. 저 비행기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과 싸우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을까. 하지만 지금은 마치 치매에 걸린 사람처럼 멍하니 자리를 지키고 있다. 과거란 그런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때론 각자가 가진 기억을 잊어버려야 할 필요도 있다. 너무 많은 과거에 침식하면, 마치 암초 사이에 갇힌 배와 같이 서서히 수면 아래로 침몰하기 때문이다. 


나는 사실 왕년을 계속 이야기 하는 사람들은 과거에 최선을 다해서 살았기 때문에 과거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잠시 지금의 현실을 벗어나기 위해 추억에 빠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추억하는 것은 아무런 돈도 들지 않아 유용하고, 내 맘대로 미화시켜 이야기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 순간을 열심히 살았으면 더 많은 변명을 하지 않는다. 단지 ‘난 그 때 열심히 살았다.’라고 말해도 충분한 여운이 남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때 그 순간도 열심히 하지 않았다면 과거는 변명과 회한의 추억이 될 뿐이다.

 





나는 가끔 마흔의, 쉰 살의 내가 두렵다. 그 때 가서 누군가에게 “내가 왕년에는~” 이라며 현재가 아닌 과거 이야기만 주구장창 늘어놓는 사람이 될까 봐 그렇다. 박제된 기억을 미화시켜서 꾸며내는 사람이 아니라, 현재 살아있는 순간의 기억을 붙잡는 사람이 되고 싶다. 추억담을 이야기하고 싶어서 입이 간질간질 거릴 때는 입을 굳게 닫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지나간 옛날은 나의 기억이지만 지금의 내가 아니다. 옛 순간의 모습에 빠져 지금을 무시한다면 더 많은 부분을 수정해야 하는 현재가 남을 뿐이다. 그래서 초심을 유지하는 것은 어려운 것일까?


인생의 Frozen Hero가 되지 않으려면 꼭 기억해야 하는, 다시금 돌아오는 한마디 ‘Carpe Diem!’. ‘현실을 살라!’는 이 말이 어려운 것은 현실을 살려고 하는 사람이 많지 않다는 반증일 것이다. 숲에서 갈 길을 잃고 헤매며 자리를 잡은 비행기들이 안쓰러운 이유는, 사람으로 빗대면 저런 사람들이 “왕년에”를 가장 많이 부르짖기 때문이다.

 

- 겨울왕국 <Let it go> 


문득 <겨울왕국>의 엘사가 생각난다. 자신의 틀에 갇힌 옛날에서 벗어나 모든 걸 ‘다 잊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엘사가 꽝! 하고 발을 내려치니 그녀에게 새로운 인생을 선사할 얼음 궁전이 땅에서 솟아 오른다. 머리를 풀기 전 그녀가 내뱉은 한마디, “The past is in the past.” 역시 과거는 ‘다 잊어야 하는’ 과거일 뿐이다. 

 

 


 

 

 

나는 불현듯 겨드랑이가 가렵다. 아하, 그것은 내 인공의 날개가 돋았던 자국이다.
오늘은 없는 이 날개. 머릿속에서는 희망과 야심이 말소된 페이지가 딕셔너리 넘어가듯 번뜩였다.

나는 걷던 걸음을 멈추고 그리고 일어나 한 번 이렇게 외쳐 보고 싶었다.
날개야 다시 돋아라.
날자. 날자. 한 번만 더 날자꾸나.
한 번만 더 날아 보자꾸나.

 

-『날개』, 이상.

 

 

결국 움직여야 인생은 바뀐다. 혹시라도 지나간 추억들에 갇혀 나 스스로 나의 인생을 얼게 만든 것은 아닌가 생각해본다. 그리고 이 순간이 바로 내가 ‘한 번만 더 날아 봐야 하는 순간’이라고 생각했다. 전 회사에 관한 꿈을 꾸지 않기를 바라며, 나도 ‘다 잊고’ 지금 이 순간의 희열을 느끼며 살아야겠다고 다짐한다.

 

- 사진 출처 : 임안나 작가 블로그 및 직접 촬영

 

십사

안녕하세요, 십사입니다.
미술, 만화영화, 춤, 피천득님, 법정스님을 좋아합니다.
살아있음을 기쁘게 여기며, 지혜롭고 성실하게 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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