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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마’와 아이돌

20.11.09 0

학부시절, 핵심 전공수업이었던 <미디어 커뮤니케이션>의 중간시험을 마치고 쓰지 못했던 정답 하나가 뇌리에 박힌 기억이 있다. 흔히 고등학생 시절에 상위권 성적으로 가는 비법 중 하나가 ‘오답 노트 정리’였던 것처럼, 그 문제의 ‘무답’은 몇 번씩 곱씹게 돼서 평생 기억에 남는다. 사실 지금도 그 문제가 뭐였는지 기억은 안 나도 ‘가상현실(virtual reality, VR)’라는 정답이 생생해서다. 해당 문제를 마주했을 때, 정답이 기억 날 듯 말 듯 뇌가 간지러웠던 기분과 결국 써 내리지 못하고 패배한 기분에 휩싸여 전공 프린트를 뒤적여서야 겨우 발견했었던 그 답.

 

oculus quest-2, 출처: <오큘러스 퀘스트> 
 

정답을 회상(recall)하지 못했던 이유를 변명하자면, 당시 담당교수님은 앞으로 10년 내에 가상현실이 우리의 삶에 많은 영향을 미칠 것이라 호언장담했지만, 당시로써 그렇게 “‘크게’ 와 닿지 않아서”였다. 일개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나부랭이가 관련 업계 전문가의 예측에 ‘에이~ 가상현실은 무슨 가상현실이야~’하고 가벼이 치부했던 것이다. 그런데 전문가도 괜히 전문가는 아닌가보다. 교수님의 강조가 있은지 채 십년도 되지 않았는데, 최근 몇 년 사이의 흐름을 살펴보면 VR이 생각보다 가깝게 우리의 일상 속에 스며들어 있어서다.
 

일본 <이케아> 모델 ‘임마’

출처: imma.gram

그리고 최근 일본 <이케아>가 고용한 모델의 정체가 밝혀지면서 소소한 논란(?)이 일었다. 분홍색 단발머리와 힙한 옷차림의 모델 ‘임마(imma)’는 <이케아>의 모델답게 자신의 일상을 공유하는 포스팅으로 대중들의 이목을 끌었다. 트렌디한 그녀의 옷차림과 일상에 있음직한 생생한 라이프 스타일에 인스타그램 팔로워만 해도 32만 4천 명. 이러한 열기에 자연스레 임마의 메이크업과 입은 옷, 포스터에 등장한 강아지에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졌다. 하지만 연달아 밝혀진 ‘임마’의 비밀은 다소 충격을 주었는데, 그녀가 ‘가상현실’로 만들어진 모델이라는 점이다.

 

 <IKEA Harajuku with imma> 

 

사실 임마가 너무나 자연스럽기 때문에 인스타그램의 단적인 피드만 보고서는 가상모델임을 유추하기가 쉽지 않다. (친구나 반려동물과 함께 하는 평범한 일상이 우리에게도 해당하는 지극히 평범한 일상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간 ‘임마’ 외에도 가상현실 모델이 존재했지만, 너무나 자연스럽게 연출된 그녀의 일상이 ‘묘한 기분’을 안겨주는 것도 사실이다. 사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전세계적으로 열광하는 K-POP의 아이돌문화도 ‘실제로 만날 수 없다’는 지점에서 ‘임마’의 등장과 어떤 부분에선 그 맥락을 같이한다.
 

SM 엔터테인먼트의 ‘에스파’

 

걸그룹 에스파, 출처: aespa offical 

이런 맥락을 간파한 것인지 국내 엔터테인먼트의 일인자 SM이 실제 아이돌과 가상모델이 체제를 함께하는 걸 그룹 ‘에스파(aespar)’를 선보였다. 최근 공개한 멤버별 사진과 티저에는 각자를 상징하는 AI 모델과 함께이다. 앞서 말했다시피 어쩌면 대중들이 열광하는 실물 아이돌(?)은 ‘실제로 접하기 어렵다’는 측면에서 가상현실 모델과 맥락을 같이 한다. (특히 공연에서 조차 실물을 마주할 수 없는 지금과 같은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는 더더욱 그렇다)

 

<My KARINA>

 

사실 만화책 속의 인물같이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인물을 좋아한다는 게 일반적이지 않지만, 어떤 분야보다 예민하게 트렌드를 좇는 엔터테인먼트가 가상현실을 접목한 아이돌을 데뷔시켰다는 점이 흥미롭다. 때문에 이러한 시도가 VR시대를 반영한다는 점에서 유의미하지만, 이에 따른 부작용을 우려하는 사람들도 많다. 해당 캐릭터의 지나친 성적대상화로 인해 사이버 범죄에 노출될 위험이 크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도의 기술력에서 비롯하는 범죄를 방지하고 처벌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는 여전히 미흡하다. 또한 ‘가상현실 모델을 어떻게 대할 것이냐’는 윤리적 문제 역시 수반된다.
 

오큘러스 퀘스트2
 

오큘러스 퀘스트2, 출처: https://www.oculus.com

비디오 게임 업계에서는 올 10월 중순경 출시한 VR 게임기 ‘오큘러스 퀘스트2’ 출시가 화제다. 이전 보다 저렴한 가격대와 한층 더 업그레이드 된 영상출력에 유저들의 마음을 설레게 만들어서다. 물론 ‘어차피 가짜인데 저게 뭐가 재밌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을 수 있다. (나 역시 그랬다) 하지만 인간은 ‘감각의 동물’이기에 자신의 눈과 귀에 보고 들리는 촉감이 ‘진짜’ 같으면 ‘진짜’로 착각하기 충분하다. 단순히 컴퓨터 모니터 앞에 앉아 키보드나 마우스를 두드리던 시대를 지나 (조금 크긴 하지만) VR 게임기를 소지할 수 있다면 언제 어디서나 쉽게 가상현실을 즐길 수 있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너를 만났다>

 

같은 맥락에서 올 상반기에 방영되었던 다큐멘터리 <너를 만났다>는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안겨줬다. MBC에서 예기치 않은 질병으로 세상을 마감한 딸을 VR을 이용해 만남을 주선한 것이다. 물론 죽은 생명에 대한 많은 갑론을박이 있었지만, 진짜와 가짜의 경계가 애매해진 시대가 도래했음을 알리는 신호탄 같았다. 앞으로 어떤 방식의 가상현실을 마주할지 기대된다.

 

김해인

읽는 사람이 즐거운,
언제나 유쾌한 글을 쓰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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