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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컷이 있어야 Creative와 Development로 간다

15.11.03 0


함께 회사생활을 하는 편집부 인턴이라는 이유로 꽤 가까이서 디자이너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물론 모든 회사원이 그렇겠지만, 디자인 팀의 치열함은 다른 측면에 있다고 느꼈다. 편집부는 원고를 훑어보고 다듬는 교정과 편집과정을 수차례 거쳐 최종본을 만든다면 디자인 팀은 이미지와 텍스트를 잘 섞어 여러 개 빚어낸 뒤 하나를 골라 정성스럽게 포장하는 느낌이랄까. 편집부가 원석을 깎는 세공사 같은 느낌이라면 디자인 팀은 흙을 여러 차례 빚어 하나의 도자기를 굽는 도공과도 같다. 물론 매우 짧은 기간 관찰한 결과지만 디자인팀 소속 직원들이 이 비유를 본다면 무릎을 탁! 하고 칠지도 모르겠다.

- 책 <B컷> 

 

그렇게 편집 일을 돕다 발견한 책이었다. 책 <B컷>은 선택받지 못한 시안, 즉 B컷을 주인공으로 만들어 주고 그 밑에 작게 원(原)표지를 넣어 구성했다. 또한 각 디자이너에게 북 디자인에 대한 사소하면서도 철학적인 질문을 묻고 그에 대한 답변을 담아놓았다. ‘열어보지 않는 게 좋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책은 많은 비밀을 쥐고 있었다. 부제<세 번째 서랍>과 어울리지 않는 아까운 시안들을 보며 ‘몰라야 할 것들을 알아버린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비록 서점에 진열되지는 못했지만 저마다의 사연을 안은 아쉬운 B컷들이 그렇게 책 안에 담겨 있었다. 색감, 타이포그래피, 일러스트, 캘리그래피 등 저마다 다른 이유로 B컷이 되었지만 사실 디자이너에게는 깨물면 아픈 열손가락과도 같았을 것이다.

 

 

- 『B컷』 본문에 실린 B컷과 표지, 출처: http://www.aladin.co.kr/shop/

 
시안과 함께 적어놓은 디자이너의 이야기는 당나귀 귀인 임금님 귀를 몰래 훔쳐보는 것 같았다. 디자이너로서 걸어온 각자의 여정이 시안에 비밀스럽게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책에는 표지 디자인을 할 때 드는 생각들이 자세히 나와 있는데, 읽다보면 선정 여부를 떠나 B컷이라는 존재는 더 좋은 디자이너로 성장하게 만드는 계기기도 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책의 분야와 출판사의 성격에 따라 편집자와 본인이 모두 만족하는 시안을 뽑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마치 서로 다른 성격이 조화되도록 흙으로 빚은 다음, 가마에 들어가 ‘불의 심판’을 받는 도자처럼 편집자의 마음에 들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이런 과정을 거친 B컷은 작품이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이들은 또 다른 커버를 위한 가이드라인이 되기도, 한층 더 업그레이드 된 A컷으로 재탄생하기도 한다.

 

때문에 디자이너들은 자신의 표지에 보내는 작은 응원 하나도 놓치지 않는다. 그들은 (선택과 관계없이) 시안이 받은 칭찬을 다른 표지를 구상하기 위한 기저로 삼는다. 비록 선택되지 못했지만 B컷만의 독특한 색감이나 일러스트, 인상적인 타이포나 적절한 텍스트 구성은 디자이너의 눈과 손으로 스며든다. 때문에 최종 표지가 정해질 때까지 함께 자리했다는 이유만으로도 B컷은 이미 많은 역할을 수행한 것이다

<B컷> 본문에 실린 B컷과 표지, 출처: http://www.aladin.co.kr/shop/


이처럼 표지가 되기 위한 과정 속의 B컷은 표지가 되지 않더라도 각자 맡고 있는 임무로 바쁘다. 심지어 A컷을 채택하게끔 만들기 위해 들러리로 등장하는 B컷도 있다. 때로는 이런 B컷들이 우연치 않게 표지가 되기도 한다. 따라서 디자인이 시작되는 시점에는 B컷이라는 이름의 시안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각자의 임무를 끝낸 B컷은 디자이너의 서랍장에 남아 여러 역할을 해낸다. 북 디자이너로서 지내온 시간을 되돌아보게 하고, 앞으로 디자이너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기도 한다. 이쯤 되면 베스트셀러 커버의 일등 공신은 B컷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먼저 북 디자인이라는 직업과 작업에 대해 생각해보기를 바란다.
북 디자인은 나무와 같다. 그리고 이 나무의 뿌리는 바로 ‘원고’이다.
북 디자인은 원고를 이미지화 해 독자에게 충실히 전달하면서도 보기 좋게 포장하는 작업이다.
뿌리에서 양분을 얻은 나뭇가지와 나뭇잎이 나무를 더 풍성하고 보기 좋게 만들 듯이
북 디자이너 역시 원고에서 뽑아낸 양분으로 풍성한 가지와 잎사귀를 책에 선사한다.
그러나 뿌리가 약하면 나무가 병드는 것처럼
원고가 근간이 되지 못한 디자인은 생명력이 약할 수밖에 없다.
결과적으로 좋은 북 디자인이란 ‘북 디자인의 본질적인 의미에 얼마나 충실한가.’가 관건이다.

- <B컷> 엄혜리 中

 

<B컷>에 실린 디자이너들의 이야기 중 제일 놀랐던 부분은 책 표지의 뿌리, 그 근원은 원고에 있다는 대목이다. 책을 가장 잘 알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디자인을 통제하려는 편집자와 무조건 판매 부수만을 생각해 상업적 요소만을 강조하는 마케터 사이에서 디자이너들은 신념을 지키기 어렵다. 물론 각자 입장이 다르기 때문에 나타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이 세 사람 모두 각자 손에 쥐어진 하나의 원고, 하나의 책을 무척 아끼고 사랑한다는 것이다. 서로의 마음을 100프로 충족시킬 수는 없지만, 더 좋은 책을 만들고자 하는 과정을 함께하고 있으니 이렇게 끈끈한 관계가 또 있을까, 싶었다.

<B컷> 본문, 김훈 <칼의 노래>와 <현의 노래> 표지를 디자인한 엄혜리 디자이너 


드라마를 볼 때 메인인 남자 주인공보다 눈물 고인 서브에게 마음을 빼앗겨본 사람이라면 이 책에 쉽게 끌릴지도 모르겠다. 마찬가지로 쿠엔틴 타란티노(Quentin Tarantino) 영화에 감탄사를 내뱉거나 소극장에서 기타를 뜯는 인디밴드를 향해 소리를 질러봤던 사람이라면 서랍 속에 들어있던 B컷들의 큼큼한 냄새를 이 책에서 즐겁게 맡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감성을 고스란히 담아 <B컷> 속 B컷들은 보란 듯이 큼지막하게 페이지를 차지하고 있다. 평소의 역할과는 다르게 구석에 조그맣게 A컷을 단 채로. B라는 알파벳에 나도 모르게 정감이 가는 건, 수많은 B들 사이를 잘 뒤져보면 그 구석에 나만의 ‘Best’가 존재하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화려한 메이저보다 괜스레 B급이 당기는 날, 고급 와인보다 소주잔을 탁탁 부딪혀가며 잔소리 하고픈 날. 그런 감성이 미치도록 고픈 날 펼쳐보면 많은 위로가 될 것이다.

<B컷> 에 담긴 디자이너의 B컷, 출처:  http://www.aladin.co.kr/shop/

 
많은 디자이너들이 자신의 B컷을 잊지 않고 자주 꺼내봤으면 좋겠다. 분명, B컷이 가진 특유의 큼큼한 냄새가 좋은 표지를 만드는 계기가 될 것이다. 서랍 속에서 때를 기다리던 B컷과 또 그를 아끼는 디자이너가 예쁜 표지와 좋은 디자이너가 될 가능성이 높다는 건 말해 무엇 하겠는가. 디자이너의 서랍 속에서 곤히 잠들어 있던 B컷들은 자신들이 <B컷>이라는 책에 게재될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B컷이 Best Design이 되기 위한 시간, 바로 좋은 책에 당당한 주인공 표지가 될 때를 기다리는 것. 그 시간이 바로 디자이너에게 B에서 Creative와 Develop로 나아가게 만드는 원동력이라고 믿는다.

 

도공은 흙을 고르는 것부터 도자기에 입힐 그림과 바를 유약까지 자신만의 특색을 입체적으로 구상한다. 북 디자이너 역시 원고를 기반으로 표지의 색과 질감, 서가에 꽂힐 모습까지 섬세하게 머릿속에 그려낸다. 만약 한 달에 10권을 맡는다면 시안만 30개가 넘는다. 이렇게 섬세하고 방대한 작업을 통해 얻은 많은 시안들은 책 한 권이 되기 위해 지금도 부지런히 모양새를 다듬고 있을 것이다. 동시에 이렇게 『B컷』의 비밀을 접한 당신이라면, 아마 그 전보다 훨씬 더 많은 이야기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정미 (Jeongmee)

일상 속의 작은 것들을 놓치지 않는, 큰 손을 가진 작가를 꿈꿉니다.
정(情)과 미(美)를 찾아 정미(精微)하게 그려내는 글쓰기를 희망합니다.
instagram,com/leejeongmee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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