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끼와 거북이, 현대 디자이너에게 필요한 이야기

15.05.29 2

 

 

여기 토끼가 있다. 토끼는 패션 디자이너이다. 토끼는 자신과 같은 토끼 직원들을 거느리고 있고 1년에 3~4번의 컬렉션을 연다. 하나의 컬렉션이 끝나면 토끼는 아이디어 보드에 덕지덕지 붙은 사진과 문구를 쓰레기통에 버리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끊임없이 짜낸다. 자신이 수장이기에 모든 디자인에 관여한다. 어느 순간 토끼는 지친다. 좋아해서 시작한 일이 과로가 된 것이다. 결국 토끼는 기성복 컬렉션을 중단한다. 여기까지가 최근 몇몇 디자이너들이 택한 길이다. 패션 달리기 경주에서 쉴 틈도 없이 부스터를 가동하여 최고 속도로 달리던 디자이너들이 서서히 그 속도를 늦추고 거북이의 길로 들어선 것이다. 바로 오트 꾸튀르(Haute Couture)의 길로 말이다.



- 장 폴 고티에(Jean Paul Gaultier)의 2015년 봄/여름 마지막 기성복 컬렉션. 마돈나를 위해 만들었던 콘 브라를 재해석 했다. 출처: http://www.style.co.kr

 


- 디자이너 장 폴 고티에. 마지막 기성복 컬렉션 피날레 인사를 하고 있다. 출처: http://www.style.co.kr


- 기성복 컬렉션을 중단한 뒤 장 폴 고티에의 2015년 봄/여름 오트 쿠튀르 컬렉션. 출처: http://www.style.co.kr

 

 

 

최근 디자이너 장 폴 고티에(Jean Paul Gaultier)는 2015년 봄/여름 컬렉션을 마지막으로 기성복(Ready-To-Wear) 디자인을 중단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렇게 콘 브라를 선두로 한 마지막 컬렉션이 마무리 됐다. 기성복 라인을 중단시키면서까지 그가 열정을 다해 집중하겠다고 밝힌 분야는 바로 ‘오트 쿠튀르’. 사실 현대 패션 디자이너들에게 기성복 컬렉션은 여러모로 큰 의미를 지닌다. 누군가는 ‘예술도 돈이 돼야 하지 예술이 밥 먹여주냐’고 반문한다. 기성복, 즉 레디 투 웨어 컬렉션은 이름 그대로 난해하지 않고 소비자에게 바로 입힐 준비가 된 옷을 선보이는 자리다. 결국, 예술적인 오트 쿠튀르 옷 하나를 소수에게 파는 것 보다 입을만한 기성복을 수 백장 파는 것이 더 많은 수익을 낼 수 있다. 이는 많은 고객과 투자자들에게 높은 만족감을 선물한다.

 


- 샤넬(Chanel)의 2015년 봄/여름 오트 쿠튀르 컬렉션. 출처: http://www.style.co.kr

 


- 빅터 앤 롤프(Victor & Rolf)의 2015년 봄/여름 오트 쿠튀르 컬렉션. 출처: http://www.style.co.kr

 


- 메종 마틴 마르지엘라(Maison Martin Margiela)의 2015년 봄/여름 오트 쿠튀르 컬렉션. 출처: http://www.style.co.kr

 

 

 

반면 오트 쿠튀르는 주 고객부터 다르다. 웬만한 부자가 아니고서야 오트 쿠튀르 컬렉션을 쉽게 구매하지 못한다. 가격대도 심할 경우 수 억대를 호가하지만 중요한 것은 오트 쿠튀르가 디자이너들의 숨통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오트 쿠튀르는 많은 ‘자유’를 보장한다. 따라서 디자이너들은 창의력을 발휘해 기성복에서는 보여주지 못한 예술을 표현한다. 즉, 디자이너의 창의력과 재단 장인들이 만들어내는 ‘입는 예술’이 바로 오트 쿠튀르 컬렉션이며 이는 “미적 작품을 만드는 인간의 창조적 활동”이라는 예술의 의미와도 맞닿아 있다.

 


- 1909년. 최초의 쿠튀르 디자이너 찰스 프레드릭 워스의 피콕 드레스(Peacock dress)를 입은 레이디 커즌(Lady Curzon). 출처: http://www.thefashionhistorian.com

 

 

 

과연 이러한 오트 쿠튀르의 예술 DNA는 어디서부터 온 것일까? 그 출발점은 오트 쿠튀르의 개척자로 불리는 찰스 프레드릭 워스(Charlse Frederick Worth)에서 시작한다. 그는 파리에서 황후와 귀족들의 드레스를 만들기 위해 극단적으로 사치스러운 원단만 사용했다. 워스는 자신이 평범한 디자이너가 아닌 예술가라고 굳게 믿었으며 따라서 그의 예술적 신념은 오늘날의 오트 쿠튀르 컬렉션의 뿌리가 된 셈이다.

 

 


- 오늘날의 오트 쿠튀르. 크리스찬 디올(Christian Dior)의 2015년 봄/여름 오트 쿠튀르 컬렉션. 출처: http://www.style.co.kr

 

 

 

그러나 1960년대 중반부터 오트 쿠튀르는 저력을 잃어 기성복 세대들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6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젊은 세대의 전성기가 고급화 전략만을 내세우던 오트 쿠튀르에게는 쥐약이었고 이때부터 오트 쿠튀르와 기성복 컬렉션이 명확이 구분되기 시작한다. 기성복과 동떨어진 세상을 만들던 쿠튀르는 1990년대부터 젊은 디자이너를 영입해 지루할 틈이 없는 예술 행위와 기상천외한 옷들을 선보이며 지금까지도 굳건히 자리잡고 있다.

 


- 지암바티스타 발리(Giambattista Valli)의 2015년 봄/여름 오트 쿠튀르 컬렉션. 같은 해의 봄/여름 레디 투 웨어 컬렉션 보다 더 극적이고 화려하며 디자이너의 여력을 보여주고 있다. 출처: http://www.style.co.kr

 


- 지암바티스타 발리(Giambattista Valli)의 2015년 봄/여름 레디 투 웨어 컬렉션. 출처: http://www.style.co.kr

 

 

 

오트 쿠튀르는 하루가 다르게 바뀌는 사회에서 꾸준히 예술성과 전통성 그리고 느림의 미학을 고집하고 있다. 인터넷으로 모델의 발이 런웨이에 닿기도 전에 컬렉션이 공개되고, 패션쇼를 실시간으로 시청하면서 바로 구매가 가능해진 세상이 도래했다. 심지어 더 이상 미래에 존재하지 않을 직업에는 기자가 상위권을 차지하고 있다. 이미 인터넷에서 한번 퍼진 일을 어째서 다시 평하고 보도하냐는 식이다. 패션 칼럼을 쓰는 이 순간에도 많은 패션 정보가 랜선을 타고 흐르고 있다.


어쩌면 쉽게 소비하는 시대에는 쉽게 소비될 수 있는 옷을 만들어야 한다는 수식이 정답일 수 있다. 패션은 완벽한 예술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무리 기성복 컬렉션에서 예술성을 가미한다 하더라도 그걸 다시 상업주의적인 관점에서 잘 팔리는 ‘무난한 옷’으로 둔갑시켜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전자제품처럼 허겁지겁 팔아 치우기 위한 디자인 행위가 옳지 만은 않다. 무엇보다 패션이 수많은 역사를 거쳐오며 지켜온 ‘예술성’과 ‘정성’을 지키는 일이 시급하다. 특히, SPA 브랜드들이 더 이상 럭셔리 패션 브랜드를 모방하지 않고 자체적인 유행을 짤막하게 주도하고 있는 지금, 우리는 쿠튀르의 느림의 미학과 예술성을 잊지 말아야 한다.


디자이너 니콜라스 게스키에르(Nicolas Ghesquiere)는 “그곳 사람들(이전 직장의 임원 혹은 투자자)은 패션이 요구르트나 가구가 아니라는걸 절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패션을 훨씬 더 복제 가능하고 평범한 것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라고 일침을 가했다. 그리고 장 폴 고티에는 더 이상 기성복을 만들지 않겠다고 못을 박았다. 바쁘게 달려가는 패션계에 거북이의 미학의 바람이 불었다. 꼭 쿠튀르가 아니더라도 기성복에서도 가능한 한도 내에서의 예술성을 표현해야 할 때가 도래했다.


토끼들은 지쳐가고 있고 반복되는 무난한 컬렉션에 경기 관람자들은 지루해 하고 있다. 이때 거북이가 등장해야 한다. ‘실험 정신’과 ‘창의력’ 그리고 ‘장인’이라는 삼박자가 골고루 갖춰진 거북이의 컬렉션은 패션이 공장에서 찍어낸 소모품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할 것이다. 패션은 지루한 소모품이 아니다. 기존의, 그리고 앞으로 탄생할 디자이너들은 이 점을 명심하고 패션의 예술성을 지켜나가기 위해 거북이가 되어야 할 것이다. 적어도 기성복 컬렉션 안에서라도 말이다.

 

 


참고 서적


< 패션, 문화를 말하다-패션으로 20세기 문화 읽기> (이재정, 박신미)
<패션을 뒤바꾼 아이디어 100> (해리엇 워슬리, 김지윤 역)

 

Lyla

오아시스와 에드워드 호퍼, 이브 생 로랑과 아제딘 알라이아를 사랑합니다.
많은 일을 경험해보고 싶고 이뤄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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