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Features  /  REVIEW

제가 바로 그 '요즘 것'들의 작품입니다, <X:1990년대 한국미술>展

17.01.13 0


나, X세대? 출처: 브런치, 젊음을 위한 나라는 없다

 

“요즘 것들은 버릇이 없다”는 말은 이집트 벽화에도 적혀있을 만큼 아주 오래된 관용어라고 한다. 그도 그럴게, 굳이 저 말이 아니어도 몇몇 기성세대들은 “나 때는 안 그랬는데...”라는 말을 쉽게 내뱉곤 하니까. 한 사람이 태어나면 그 사람의 인생의 80%는 ‘시대적 배경’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고 한다. 생각해보면 너무나도 당연한 이 명제들에 대해 우리는 깊게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숨을 쉬듯 시간은 흐르고 있고, 자신이 처한 문제나 혜택에 대해 ‘시대적 배경’을 자각하기보다 개인적 차원의 이유로 치부하기 쉬워서다. 

 

19세에서 29세까지의 연령층을 지칭하는 ‘X세대’는 전쟁을 겪은 부모세대가 피땀 흘려 이룩한 ‘풍요한 시대’의 젊은이들이다. 전쟁의 비극이나 배고픔의 눈물을 흘려보지 않은 그들은 변화를 추구하는 성향이 강하고, 기성세대와 달리 자기주장이 뚜렷하고 하고 싶은 일은 눈치 보지 않고 하는 특징을 갖고 있다.

 

기성세대와 반대되는 ‘신세대’의 개념이 본격적으로 등장한 건 1990년대부터다. 위 글에서도 쉽게 알 수 있듯, X세대라 불리는 신세대의 등장은 그야말로 센세이션 한 일이었다. 재미있게도 이러한 사회현상에 대해 사람들은 마치 동물원 속 동물을 분류하듯, 이들을 자신과는 다른 부류로 구별하여 명명했다.

 

한마디로 ‘X세대’는 ‘개성주의’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외모부터가 그렇다. 남자가 귀고리, 목걸이를 하는가 하면 여자가 군화를 신고 대로를 활보한다. 커뮤니케이션 수단도 다르다. ‘X세대’에게 삐삐는 필수품이며 ‘천사(1004)’, ‘빨리빨리(8282)’등 암호 같은 숫자로 교신한다. 식성이나 기호도 기성세대와는 판이하다. 김치나 된장찌개보다는 햄버거나 피자를 즐기고, 패스트후드나 로바다야끼집, 분위기 좋은 카페를 선호한다.

 

해당 칼럼은 지금으로부터 20년 전에 쓰여진 <X세대, 어떻게 보아야 하나>는 제목의 글이다. 글은 그야말로 X세대를 어떻게 바라봐야할지 난감해하는 기성세대의 고충이 묻어난다.

 

‘X세대’의 공통점 중 하나는 유행엔 민감해도 정치나 사회문제는 관심 밖이라는 것을 꼽을 수 있다. 즐겨 읽는 책 종류도 소설이나 신세대 감각의 에세이가 주류를 이룬다. 노래도 기성세대들은 따라 부르기 어려운 최신 유행리듬을 즐기며, ‘저녁이 되면 의무감으로 전화를 하고...’등 가사에도 그들만의 독특한 의식을 담고 있다. 최근에는 거리 농구를 즐기고, 컴퓨터 오락에도 심취하는 게 X세대의 풍속도다. 이 같은 개성파 신세대들은 기성세대들이 자신들의 ‘개성’을 존중해줄 것을 요망한다. 하지만 기성세대들은 ‘오렌지 족’으로 불리우는 젊은이들의 무절제한 성(性)관념이나 과소비 풍조를 개탄한다.


-출처: <X세대, 어떻게 보아야 하나> 정중헌,94년 월간샘터

 

글을 보면, 길거리 농구를 즐기거나 컴퓨터 오락을 좋아하는 게 무슨 문제라도 될 게 있나 싶다. 동시에 ‘유행엔 민감해도 정치나 사회문제는 관심 밖’이라거나 ‘무절제한 성(性)관념과 무절제한 과소비 풍조’라는 표현에 반감이 들만큼 ‘일반화’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사고인지 체감하게 된다. X세대가 무슨 하늘에서 떨어진 외계인도 아닐 텐데, 오락을 향유하는 풍조가 과거에는 마치 없었던 일처럼 모르쇠 하는 것도 조금 이상하다. 그러나 이 글이 쓰여 졌던 시기가 1994년인 것을 감안하면 ‘X세대’의 등장이 얼마나 센세이션 했으면 그랬으랴. 당시 등장한 미술의 흐름과 평가도 이와 별반 다르지 않다. 



90년대는 70년대의 모더니즘, 80년대 민중미술 정서와 구별되는 탈 이데올로기적 시대정신을 보여준다. 자유정신에 입각한 예술 활동은 정치, 사회, 문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 발휘됐다. (90년대 미술은) 한국 현대 미술사에서 새로운 기운을 만들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출처: 포커스 뉴스, 김홍희 시립미술관 관장

 

SeMA GOLD <X:1990년대 한국미술>展 출처: 서울시립미술관 제공

 

X세대를 바라보는 이런 관점에서 서울시립미술관이 재미있는 전시를 하고 있다. 바로 90년대에 2~30대를 보냈던 작가들의 작품을 다룬 <X:1990년대 한국미술>展이다. 그로부터 20년이 훌쩍 지나 ‘N포 세대’가 되어 작품을 보고 있자니 어쩐지 촌스러우면서 매력적인 작품들도, 현재까지 해당하는 메시지가 담겨 신기한 작품들도, 시대의 흐름을 물씬 느낄 수 있는 작품들도 곳곳에 숨어있다.

 

1) 촌스러우면서도 매력적인 장면

순서대로 90년대 종로3가, 대학로, 강남역 사거리 풍경. 해당 사진은 본 전시와 무관, 모든 사진 출처:http://www.gasengi.com

 

입구에 들어서면 한쪽 벽면에 촌스런 영상이 하나 흘러나온다. 영상 속사람들은 촌스런 옷차림을 하고 각자의 일상을 누빈다. 커다랗고 동그란 안경을 쓰고 생선 값을 책정하는 아저씨와 일렬로 길게 펼쳐진 책상 위로 선풍기 하나만 놓고 일에 열중하는 회사원들, 수더분한 여름양복 차림으로 하루의 증권시장을 마감하는 증권사 사람의 모습 등, 화면은 어느 90년대의 누군가의 하루를 담고 있다. 알고 보니, 영상은 영화 <죽여주는 여자>와 <두근두근 내 인생>을 연출한 이재용 감독의 <한 도시 이야기>란다. 그는 1994년 6월 4일의 24시간동안, 다양한 분야에 종사하는 700여명의 사람들을 동원해 ‘서울의 일상’을 담았다. 700여명의 사람들은 각자 사진기와 비디오를 들고 서울의 거리로 뛰쳐나가 94년 6월 4일의 <한 도시 사람들>을 촬영했다.

이재용 감독의 <한 도시 이야기> 저작권 문제로 촬영불가하여 2014년 서울역사박물관에 전시된 전경으로 대체, 출처: 오마이뉴스

 
사실, 영상에 특별한 기교가 녹아있는 건 아니다. 그래도 강렬한 인상이다. 나 역시 알 수 없는 분위기에 매료되어 한참 화면을 바라보다 “예전에는 진짜 저랬었나?”, “맞아, 맞아. 진짜 그랬던 것 같아!”(90년대 초반에 너무 어려서 기억이 정확하지 않음)하고 감상을 표하다가도 영상에 등장하는 사람들이 지금은 어떤 삶을 살고 있을지 문득 궁금해졌다. 그렇게 수많은 사람들의 하루를 지켜보고 있자니 <서울사람들(humans of Seoul)>이 떠올랐다. 아무래도 인류에게 ‘사람’의 존재는 그 자체만으로도 영감이 되는 소재이자 철학이 되는 모양이다.

 

 

2) 바뀌지 않은 현실: 지금도 여전한 것들에 관해 

 

<낙태(Abortion)> 이불, 1989, 출처: 헤럴드 경제

 

한편, 미성년자관람불가로 설정된 구역에는 작가 이불(Lee bul)의 <낙태>가 재생된다. 전시에 대한 어떤 사전적 지식도 없이 영상을 관람했던 터라, 천장에 설치된 쇠사슬에 매달려 전라의 상태로 고통을 표하는 그녀의 얼굴과 땀으로 뒤덮인 몸이 폭력적으로 다가왔다. 그녀의 퍼포먼스는 직관적으로 낙태를 떠올리게 했고, 예상이 빗나가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았을 땐 미묘한 기분이 들었다. 갓 대학을 졸업한 여성이 개인적인 경험을 살려 저런 퍼포먼스를, 당시 낙태풍조가 만연했음에도 금기로만 치부했던 영역을 이토록 적나라하게 표현했다는 사실이 신선했다. 그리고 해당 퍼포먼스가 1990년대 발표되었다는 사실에 우려 섞인 마음이 들기도 했다. 아마 당시의 사회는 작가 이불을 보며 ‘무절제한 성(性)관념’을 운운하지 않았을까, ‘여하튼 요즘 젊은것들은’으로 시작하는 상투적인 말을 남발하진 않았을까, 라는 생각이 들어서다.

 

<무제(갈망)>, 이불, 1989작품 재구축 

 

그 후로 이어지는 이불의 작품 또한 재미있다. 전시장 입구에는 사람의 몸, 혹은 내장, 혹은 남성의 페니스로도 보이는 촉수 달린 기괴한 덩어리가 달려 있다. 이불은 낙태 퍼포먼스 이후 몸에 대한 작업이 확장되었는데, 당시 여성에게 가해지는 신체에 대한 억압, 여성성에 대한 담론 등, 민감한 요소를 건드리는 <무제(갈망)>을 제작했다. 사실 이 부분에서 웃음이 터졌는데, 이불은 이 기괴한 옷을 뒤집어쓰고 서울과 도쿄 거리를 무려 12일 동안 활보했다고 한다. 심지어 일본에서는 이런 차림의 이불을 보고 경찰까지 출동했다고 하니, 이토준지 만화에나 나올법한 괴물이 거리를 활보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Cravings> 이불, 1989

 

 <수난유감: 당신은 내가 소풍 나온 강아지 새끼인 줄 알아?> 이불, 1990

 

더 재미있는 건 작품의 제목이다. 작가는 해당 옷을 입고 돌아다닌 퍼포먼스를 <수난유감-당신은 내가 소풍 나온 강아지 새끼인 줄 알아?>라고 당차게 이름 붙였다. 사실, 제목은 기존 남성위주로 돌아가는 사회를 비판하는 최승자 시인의 <다시 태어나기 위하여>라는 시의 한 구절에 등장하는 표현이다. 그런데, 이불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표정 또한 정말 ‘소풍 나온 강아지 새끼’를 보는 것 같아 재미를 더한다. 무엇보다 작가의 퍼포먼스가 재밌고도 사랑스러운 건, 자신을 흥미롭게 바라보는 사람들을 향해 “내 몸의 주인은 나야. 그니까 내가 내 몸 가지고 뭘 하든 관심 좀 꺼줄래?”라고 말하는 것 같아서다. 생각해보면 20년이 지난 지금도 사회는 여성들의 몸에 자유를 허용하지 않는다. 구시대적 발상인 '낙태금지법'이나 '가임기여성지도'만 봐도 “여자의 몸은 소중해. 앞으로 아기를 가질 몸이잖아”라는 전제가 깔려있다. 언뜻 보면 정상 같은 이 문구는 상당히 위험하다. 내 몸에서 일어나는 일은 타인이 아닌 내가 스스로 결정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임신과 출산뿐만 아니라 내 몸에 일어나는 일에 대해 주체가 되어 스스로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 

 

3) 시대의 흐름: 침식제공, 월수 150보장, 초보환영

저작권 문제로 촬영불가하여 <병치:그늘>展 사진으로 대체, 출처: 신세계 블로그

 

그리고 가장 생각할 거리가 많았던 작품은 윤동천 작가의 문구였다. 벽에는 90년대를 풍자하는 문구가 당대 사진을 배경으로 나열돼있다. <함께 가자 우리 상식이 통하는 사회>, <침식제공 월수 150보장 초보환영>, <다시 뛰는 한국인, 뛰는 놈만 죽도록 뛰는 한국인>, <하늘을 봐야 별을 따지>, <쉬고 싶다 일하고 싶다>, <어른이 되고 싶다 하지만 어른이 되고 싶지 않다>등의 여러 주제의 문구들이 뒤섞여 있는데, 재미있는 장치는 관람객이 마음에 드는 문구를 골라 그에 공감하는 이유를 직접 적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적힌 이유들은 한데 모여 책이 된다. 그리고 이러한 퍼포먼스는 20년 전에도 행해졌다. 그래서 한쪽 테이블에는 20년 전의 사람들이 동일한 문구에 대해 코멘트 한 책자가 놓여있다. 책자를 읽다보면, 다소 올드한 표현에 웃게되고 ‘미술’에 대한 당대 사람들의 생각이 흥미롭다. 한 가지 안타까웠던 점은 <침식제공 월수 150보장 초보환영>을 마주하고 나서였는데, 세상에나. 20년이 지난 지금은 과연 임금 150을 보장하던 과거에서 얼마만큼이나 나아진걸까.

 

응답하라 1988, 출처: VISUAL DIVE

 

흔히 경제가 어려울수록, 사는 게 핍박할수록 과거에 대한 향수가 커진다고 한다. 그래서 지난 몇 년간 큰 인기를 끌었던 <응답하라>시리즈나 꾸준히 인기 있는 레트로 분야도 같은 이유에서 인기의 원인을 분석하기도 한다. 하지만 ‘지나간 시절에 대한 향수’는 ‘지나간 사랑’과 같다. 마치 지난 사랑에 대해 “우리 그때 좋았었지”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현실적으로 그 때로 다시 돌아갈 수 없다는 걸 너무나도 잘 알기에 순간은 미화가 되기 쉽다. 분명 90년대에도 나름의 어려움과 힘듦이 있었을 텐데, 우리는 90년대를 ‘문화폭발기’로 칭하고 ‘풍성했던 한 때’로 기억한다. 그런걸 보면 어쨌든 사람은 삶을 계속 이어나가야하므로 기억의 쓴 부분을 지운채 단부분만 기억하는 것 같다. 실은 지나간 시절도 우리가 숨 쉬고 있는 지금이었는데 말이다. 때문에 지금 또한 과거가 되면, 우리는 지금의 시절을 그리워할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우리는 매 순간을 충실히 기억하며 기록하고 의식하며 살아야 한다.

김해인

읽는 사람이 즐거운,
언제나 유쾌한 글을 쓰고 싶습니다.

0 Comments